최승희 이야기 (78) 썸네일형 리스트형 [マルセイユ1939公演] 5.芸術的同伴者 安幕は崔承喜のマネージャー、救助者、励まし者であっただけでなく、崔承喜の芸術的な伴侶でもあった。崔承喜自身が明白にそう明かしたことがある。崔承喜は世界巡回公演を終えて日本に帰国した直後、1941年4月号に掲載した寄稿文で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 「今迄の私の踊りの足跡をかへり見る時、彼は良き良人であつたし、私にとつては唯一人の藝術的同伴者であつたやうな氣がする。もしも私のやうな者が、東京や歐米に於いていくらかなりとも足跡な残し得たものがあるとするならば、私のふんだ足跡の上には、影の如く彼の足跡なるものが、大きくかさなつてゐるやうに私だけには思はれてならない。 「然し私につては、彼は舞踊藝術なるものを築き上げた彼である。彼は自己のトルストイたらんとする文學的熱意を、私に舞踊的熱意として示して下された。彼が文學する心をもつてゐたがために、彼はパプロウアもアルへンテイナも知ることが出来たのであ.. [마르세유1939공연] 5. 예술적 동반자 안막은 최승희의 매니저, 구원자, 격려자였을 뿐 아니라, 최승희의 예술적 동반자였다. 최승희 자신이 명백하게 그렇게 밝힌 바 있다. 최승희는 세계순회공연을 마치고 일본에 돌아온 직후 1941년 4월호 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지금까지 나의 춤이 걸어온 발자국을 보면, 그는 좋은 남편이었고, 유일한 예술적 동반자였다. 만약 내가 도쿄나 구미에서 어느 정도 발자국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내 발자국 위에 그림자처럼 그의 발자국이 크게 겹쳐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 이상이다. 그는 나의 무용예술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는 내게 무용적 열의를 보여 줬다. 그는 문학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파블로바와 아르헨티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무용적으로 성장한 것이 있다면.. [マルセイユ1939公演] 4.朝鮮舞踊の奨励者 安漠が京城時代に窮地に陥った崔承喜を救出し、東京時代に崔承喜の舞踊活動のためにマネージャーとして活躍したのは事実だが、安漠の役割が救助隊員とマネージャーにとどまったわけではない。 崔承喜が朝鮮舞踊を始めたのも一人の決断ではなかった。師匠である石井漠の勧めと夫の安漠の説得があったからだ。石井漠は彼の著書「私の顔(1940:33)」に掲載された「崔承喜と趙澤元」という文章で当時の状況をこう述べている。 「それから三年たつて、私の勤めによつて、東京で第一回の發表會をやる事になつた。承喜の舞踊に特徴を持たせる意味で、その時、ピクターの用件で上京中の朝鮮舞踊の大家韓氏の下にやつて、朝鮮舞踊の手法を速成的に稽古をさせ、本人が嫌だといふのを、私が無理矢理に纏めてやつて、題名も「エヘヤノアラ」と命名し、それを上演した處が計らやも大評判となつて、 「その後自分でも、頻りに朝鮮風の舞踊を上演するやうになつ.. [마르세유1939공연] 4. 조선무용 격려자 안막이 경성 시절 수렁에 빠진 최승희를 구출하고, 도쿄 시절 최승희의 무용 활동을 위해 매니저로 활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안막의 역할이 구조대원과 매니저에 머문 것은 아니다. 최승희가 조선무용을 시작한 것도 혼자의 결정이 아니었다. 스승 이시이 바쿠의 권유와 남편 안막의 설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시이 바쿠는 그의 저서 에 실린 “최승희와 조택원”이라는 글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고, 내 책임아래 도쿄에서 첫 번째 발표회를 하게 되었다. 승희의 무용에 특징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당시 빅터(레코드사)의 일로 상경 중이던 조선무용의 대가 한(성준)씨 밑에서 조선무용의 기법을 속성으로 연습하게 하고, 본인이 싫다는 것을 내가 억지로 권하여 제목도 라고 하고, 그것을 상연한 .. [マルセイユ1939公演] 3. 救助者 安幕は妻崔承喜が本格的に公演活動を始めたとき、喜んでマネージャーの役割を果たしたが、崔承喜が困難にぶつかったとき、前途を示す道しるべとなった。結婚直後、崔承喜が舞踊をあきらめないように説得したことと、東京時代に朝鮮舞踊を始めるように励ましたことだ。 二人は1931年に結婚した。5月9日、東大門の外の宴会場清凉館でだった。 (一部の記録に安漠と崔承喜の結婚式場が仏教寺院の淸凉寺あるいは永導寺と記載されているが、これは誤りである。永導寺は記憶の誤りであり、尼僧寺の清凉寺が結婚式場として貸し出されるはずがない。清凉寺から近いところに宴会場を備えた料理屋清凉館があり、その宴会場が結婚式場だった). 結婚直前の崔承喜は、京城で舞踊活動を続けることが困難な状況に陥る。熱心な公演活動にもかかわらず、舞踊研究所は財政難に陥り、マスコミは絶えず悪質なスキャンダルを探し、後援者たちは崔承喜を餌食にしようと.. [マルセイユ1939公演] 2. マネージャーの安漠 崔承喜の公演日程や旅行動線、広報内容などの公演企画には、夫の安漠がマネージャーとして深く関わっていたことは広く認められている。安幕のマネージャーの役割は、当時の文化芸術界やマスコミ関係者から高く評価されていた。 例えば、1977年の日本雑誌『グラフィケーション』7月号の「崔承喜特集」には対談が掲載されており、この対談には1930年代の評論家・光吉夏弥(1904-1989)とジャーナリスト・評論家の尾崎宏次(1914-1999)が参加している。 1929年に慶應義塾大学経済学部を卒業し、1930年代から児童文学や写真、舞踊の分野で評論家や著述家として活躍した光吉夏弥は、「ぼくも安君に会ったのは、外国から帰ってからですよ。」と語り、「もうそのころは、彼は一流の興行師と言うかインプレザリオでしたね。」と語った。 彼はまた、安漠が「こっちへ帰ってから、関西とか静岡辺までいろいろ興行するわけでし.. [마르세유1939공연] 2. 매니저 안막 최승희의 공연 일정과 여행 동선, 홍보 내용 등의 공연기획에는 남편 안막이 매니저로서 깊이 관여했다는 점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안막의 매니저 역할은 당대의 문화예술계나 언론계 인사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예컨대 1977년 일본 잡지 의 7월호 “최승희 특집”에는 대담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대담에는 1930년대의 평론가 미츠요시 나츠야(光吉夏弥, 1904-1989)와 언론인 겸 평론가 오자키 코지(尾崎宏次, 1914-1999)가 참석했다. 1929년 게이오대학(慶應義塾大学)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30년대 이래 아동문학과 사진, 무용 부문의 평론가와 저자로 활약했던 미츠요시 나츠야는 자신이 “안막씨를 만난 것은 외국에서 돌아온 뒤”였다면서 “그 즈음 그는 일류 흥행사라고 할까, 임프레사리오였.. [マルセイユ1939公演] 1.マルセイユ公演 崔承喜は1939年にヨーロッパ公演を開始した。1月31日のパリ公演はサルフレイユ劇場で、2月6日のブリュッセル公演はボザール劇場だった。 両方とも収容観客2千人の大劇場であったが、いずれも満席か満席に近かった。前年のアメリカ公演とは異なり、大成功を収めたのである。 アメリカでもヨーロッパでも崔承喜のダンスに差があったはずはない。それにもかかわらず、このような興行成績の差が出たのには、少なくとも3つの理由があった。 第一に、アメリカに偏った反日感情がヨーロッパにはほとんどなかった。日本のパスポートで旅行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崔承喜は、時に日本人として、彼女の公演は日本公演として紹介されることもあった。日本の中国侵略と南京大虐殺が知られるようになり、アメリカでは反日感情が広まり、崔承喜の公演も日本公演と見なされ、不買運動の対象になった。しかし、軍国主義日本よりナチス獨逸とファシスト伊太利を.. 이전 1 2 3 4 5 6 7 ···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