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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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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세유1939공연] 1. 마르세유 공연 최승희는 1939년 유럽순회공연을 시작했다. 1월31일 파리공연은 살플레옐 극장에서 열렸고, 2월6일 브뤼셀공연은 팔레드 보자르극장이었다. 둘 다 수용관객 2천명의 대형 극장이었는데 모두 만석이거나 만석에 가까웠다. 전 해의 미국순회공연과는 달리 대성황을 이룬 것이다. 미국에서나 유럽에서나 최승희의 춤에 차이가 있었을 리 없다. 그런데도 이런 흥행 차이가 나타난 데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미국에 편만했던 반일감정이 유럽에는 거의 없었다. 일본 여권으로 여행해야 했던 최승희는 때로 일본인으로, 그의 공연은 일본공연으로 소개되곤 했다. 일제의 중국 침략과 난징 대학살이 알려지면서 미국에서는 반일감정이 팽배했고, 최승희의 공연도 일본공연으로 치부되어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군국주..
[남미취재] 0. 준비의 시작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마르세유 공연] 12. 일출과 몽골과 티롤 1930년대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은 “일본 국가의 조선 민족”으로 요약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일률적이지는 않았다. 최승희가 유럽에 체재하는 동안 보도된 프랑스어 신문들의 서술을 보면 크게 세 가지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조선을 일본과 동일시하는 시각이었다. 1939년 2월6일자 에는 네덜란드 무용가 다르자 콜라인(Darja Collijn)과 최승희를 비교하는 평론이 실렸다. 평자는 다르자 콜라인을 ‘운하와 풍차의 나라에서 온 무용 선교사’로, 최승희를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에서 온 무당(=제사장)’으로 소개했다. “운하와 풍차의 나라”가 네덜란드를 가리켰던 것은 분명하지만,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는 조선이 아니라 일본을 가리킨다. 당시 유럽에서는 조선을 “..
[마르세유 공연] 11. 일본 제국과 조선 민족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은 최승희와 일제당국의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기획되었다. 일제 당국은 악화되는 미주와 서유럽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최승희를 문화사절로 활용하고자 했고, 최승희는 조선무용을 세계에 알리고 자신도 정상급 무용가로 자리 잡고 싶었다. 따라서 최승희와 일제 당국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도움을 주고받아야 했다. 최승희는 일본 여권으로 여행하면서 일본의 문화사절로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일제 당국은 최승희의 공연을 지원하면서 그가 조선인 무용가로 홍보되는 것을 용인해야 했다. 그런데 이러한 타협과 양보에도 넘지 못할 선이 있었다. 최승희는 일본 제국을 비난할 수 없었고, 일제는 최승희 공연의 내용, 즉 조선무용에 대해 간섭할 수 없었다. 일제가 공연 내용에 간섭한다면 최승희는 세..
[마르세유 공연] 10. <반도의 무희>의 삼일절 개봉 ‘반도의 무희(半島の舞姬)’는 일본 언론이 붙여준 최승희의 별명이었다.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일본인들은 일본열도를 ‘내지(內地),’ 조선을 ‘반도’라고 불렀다. 따라서 ‘반도의 무희’라는 별명은 ‘조선의 무용가’라는 뜻이었다. ‘내지’에 대한 상대어로서 ‘반도’는 때로 하대와 경멸의 뜻을 갖기도 했지만 최승희의 경우는 그런 비칭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최승희 자신도 ‘반도의 무희’라는 별명을 불쾌하게 여기거나 회피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였다. 최승희가 첫 번째 미주순회공연에 나섰던 1938년 그의 공연 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엔젤레스에서의 공연이 미국내 극렬한 반일 분위기 속에서 보이콧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공연 보이콧은 뉴욕에서도 계속되었고, 결국 ..
[마르세유 공연] 9. 최승희와 안막의 삼일절 기미년 만세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최승희는 숙명여자보통학교(=초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8세의 최승희가 만세 운동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렇지만 당시의 상황을 목격했을 것이고, 형제와 선배들로부터 만세 운동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당시 최승희는 매일 광화문 대로를 건너 다녔다. 집이 수창동, 학교가 수송동이었기 때문이다. 등하교 길에 최승희는 경복궁이 헐리고 총독부 건물이 세워지는 것을 목격했고,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진급한 기미년 3-5월에는 석 달 동안 계속된 만세운동의 격렬함과 일제 경찰과 헌병의 가혹한 탄압을 목격했을 것이다. 최승희의 남편 안막도 만세운동 당시 9세로 안성보통학교 2학년 학생이었을 것이므로 그 역시 만세운동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역시 가족과 선..
[마르세유 공연] 8. 만세전과 만세후 최승희가 마르세유에서 조선무용을 공연한 1939년 3월1일은 기미년 만세운동 20주년 기념일이었다. 일본의 강점과 식민지배에 항거해 조선민중이 봉기했던 혁명적 사건이 일어난 지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기미 만세운동은 조선인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3.1만세운동은 조선 사회를 밑바닥부터 뒤흔든 엄청난 사건이었다. 독립국 지위를 잃고 보호국(1905년)과 식민지(1910년)로 전락한 조선 민중의 울분이 폭발한 사건이었고 독립을 되찾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대내외에 선언한 사건이었다. 독립이 되기까지는 그로부터 25년이 더 걸렸지만 만세운동은 조선의 많은 것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양시킨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구성되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 제국주의가 무단통치를 포기하고 문화통..
[마르세유 공연] 7. 프랑스혁명 기념의 열기 1939년 프랑스 순회공연을 단행했던 최승희와 안막은 마르세유 공연을 3월1일에 갖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다고 추론했었다. 그래서 파리에서 더 멀리 떨어진 칸에서 먼저 공연한 후, 다시 마르세유로 돌아와 3월1일의 공연을 하게 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동선을 무시하고 순서를 바꿔서라도 공연을 특정한 날에 맞추려고 했다면, 그 장소 혹은 그 날짜에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1939년 3월1일이 삼일절 20주년 기념일이었고, 프랑스혁명 중심지의 하나였던 마르세유가 1939년에 대혁명 150주년을 맞았다는 점 때문에 최승희와 안막 선생이 “삼일절 마르세유 공연”을 추진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유일한 가능성이었을까? 특정 날짜에 특정 지역에서 공연을 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