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남미 순회공연

(24)
[中南米巡回公演] 11.プエルトリコ公演(2) 大学劇場 崔承喜のプエルトリコ公演が開かれた劇場はプエルトリコ大学劇場だった。 この劇場について少し混乱があった。 1940年3月13日の「ラ·トーレ」の記事には劇場情報がなく、4月17日の「ラ·トーレ」の記事には「新しい講堂で(en el Nuevo Auditorium)」とだけ書かれていた。 この「講堂」を調べてみると、今のを指す言葉だった。 プエルトリコ大学の教授と学生たちはこの劇場を「講堂」と呼んだようだ。 が大学新聞だったことを考慮すれば、十分あり得ることだった。 プエルトリコ大学劇場は当時はもちろん、今日の基準でも立派な建築物だった。 客席が2,085席で、冷房装置を備えた大型舞台と大学ロゴを刻んだ最高級幕を備えた。 パイプオルガンが設置され、絵を展示する回廊と館内売店、2つのチケット売り場を備えた本格大型劇場だった。 この劇場が発行した最近の案内文を見ると、これまでこの劇場は「学..
[중남미 순회공연] 11. 푸에르토리코 공연 (2) 대학극장 최승희의 푸에르토리코 공연이 열렸던 극장은 푸에르토리코 대학극장이었다. 이 극장에 대해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 1940년 3월13일의 기사에는 극장 정보가 없었고, 4월17일의 기사에는 “새로운 강당에서(en el Nuevo Auditorium)”라고만 되어 있었다. 이 “강당”을 조사해 보니, 지금의 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푸에르토리코 대학교의 교수와 학생들은 이 극장을 그냥 “강당”이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가 대학신문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푸에르토리코 대학극장은 당시로서는 물론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대단히 훌륭한 건축물이었다. 객석이 2,085석이었고, 냉방 장치를 구비한 대형 무대와 대학 로고를 새긴 최고급 막을 구비하고 있었다. 파이프 오르간까지 설치되었고, 그림을 전..
[中南米巡回公演] 10.プエルトリコ公演 (1) 日付 プエルトリコ公演が初めて協議されたのは崔承喜がハバナを訪問した1939年11月末と推定された。 この時、崔承喜はルビンスタインのピアノコンサートに合わせてキューバを訪問したが、彼女が公演したという記録は残さなかった。 ただ「キューバでルンバを観覧した」とし「そこで多くの収穫を収めた」と付け加えた。 公演をしなくても収めた「多くの収穫」は何だったのだろうか? それは崔承喜がこの時、ルビンスタインの興行会社コンシエルトス·ダニエル(Conciertos Daniel)関係者と会って南米巡回公演を、キューバのプロミュージカルアート協会(Pro Musical Art Association)に会ってプエルトリコ公演を協議したためだろう。 しかし、崔承喜のプエルトリコ公演がマスコミに発表されたのは、それから3ヵ月以上が過ぎた3月中旬だった。 プエルトリコ公演は1940年3月13日のプエルトリコ..
[중남미 순회공연] 10. 푸에르토리코 공연 (1) 날짜 푸에르토리코 공연이 처음 결정된 것은 최승희가 하바나를 방문했던 1939년 11월말로 추정되었다. 이때 최승희는 루빈스타인의 피아노 콘서트에 맞추어 쿠바를 방문했는데, 그 자신이 하바나에서 공연을 했다는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다만 “쿠바에서 룸바를 관람했”으며 “거기서 많은 수확을 거두”었다고 덧붙였다. 공연을 하지 않고서도 거둔 “많은 수확”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최승희가 이때 루빈스타인의 흥행사 콘시에르토스 다니엘(Conciertos Daniel) 관계자와 만나 남미순회공연을, 쿠바의 프로뮤지컬아트협회를 만나 푸에르토리코 공연을 협의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의 푸에르토리코 공연이 언론에 발표된 것은 그로부터 3개월 이상이 지난 3월 중순이었다. 푸에르토리코 공연은 1940년 3월13일의..
[中南米巡回公演] 9.プエルトリコ公演前後(8)ハバナ公演(?) 1939年11月末、崔承喜がキューバを訪問したが、公演はなかったと私は判断した。 ハバナ公演に対する具体的な記録が見つからなかったためだ。 キューバ公演の日付と劇場を報道した新聞や雑誌は発掘されておらず、その公演のプログラムやパンフレットも発見されていない。 しかし、ハバナ公演の可能性を完全に排除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 「ハバナ公演」を報道した2件の記事があったためだ。 まず1940年1月27日の『東亜日報』は崔承喜が同紙に送った手紙を引用して次のように報じた。 「九州に動乱が起き、残念ながら避難船に乗ってニューヨークに戻ることになった。 アメリカに渡ると、と契約を結び、南米のハバナロ公演の旅に出て、そこで多くの収穫を収め、去る(1939年)12月中旬に再びニューヨークに戻った」 朝鮮で『東亜日報』の記事が報道されてから3日後の1940年1月30日、満州の『滿鮮日報』も同じ内容を報道..
[중남미 순회공연] 9. 푸에르토리코 공연 전후 (8) 하바나 공연(?) 1939년 11월말, 최승희가 쿠바를 방문했지만 공연은 없었다고 나는 판단했다. 하바나 공연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바 공연의 날짜와 극장을 보도한 신문이나 잡지가 발굴된 바 없고, 그 공연의 프로그램이나 팜플렛도 발견된 바 없다. 그러나 하바나 공연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하바나 공연”을 보도한 2건의 기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1940년 1월27일의 는 최승희가 이 신문사에 보낸 편지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구주에 동란이 일어나 유감스럽게도 피난선을 타고 뉴욕으로 다시 가게 되었다. 미국에 건너가자 와 계약을 하여 남미 하바나로 공연의 길을 떠나 거기서 많은 수확을 거두고 지난 (1939년) 12월 중순에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조선에서..
[中南米巡回公演] 8.プエルトリコ公演前後(7)キューバのルンバ 1939年11月、崔承喜がパナマからニューヨークに帰る途中にキューバに立ち寄ったという記録はあるが、このキューバ訪問に対する具体的な記述はない。 『三千里(1940年5月号)』に掲載された崔承喜の寄稿文で、「キューバでルンバを観覧した」という記述が全てだ。 崔承喜はこの時、なぜキューバを訪問したのか? 映画「ゴッドファーザー2編(The Godfather Part II、1974)」にも描かれているように、革命前のキューバは裕福なアメリカ人の観光地だった。 しかし、崔承喜一行が観光目的でキューバに立ち寄ったようではなかった。 チェ·スンヒとアン·マクは朝鮮でも、日本でも、ヨーロッパでも観光目的で旅行したり、名士たちとの社交会に参加したことがない。 第一に、観光や社交に使うお金と時間がなく、第二に、公演以外のことには全く関心がなかったためだった。 したがって1939年11月、チェ·スン..
[중남미 순회공연] 8. 푸에르토리코 공연 전후 (7) 쿠바의 룸바 1939년 11월 최승희가 파나마에서 뉴욕으로 돌아가는 길에 쿠바에 들렀다는 기록은 있으나, 이 쿠바 방문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은 없다. 에 실린 최승희의 기고문에서 “쿠바에서 룸바를 관람했다”는 서술이 전부다. 최승희는 이때 왜 쿠바를 방문했을까? 영화 에도 묘사되었듯이 혁명 전의 쿠바는 부유한 미국인들의 관광지였다. 그러나 최승희 일행이 관광 목적으로 쿠바에 들렀을 것 같지는 않았다. 최승희와 안막은 조선에서도, 일본에서도, 유럽에서도 관광목적으로 여행하거나 명사들과의 사교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다. 첫째, 관광이나 사교에 쓸 돈과 시간이 없었고, 둘째, 공연 이외에 다른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939년 11월, 최승희가 파나마에서 뉴욕으로 항해하던 중에 쿠바에 들렀던 것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