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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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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マルセイユ1939公演] 8. ル・トラン・ブルー 崔承喜は1938年12月24日、ル・アブルを経由してパリに到着し、1939年1月31日パリ・サルフェリエール公演、2月6日ブリュッセル・パレ・ド・ボザール公演を終え、2月末にカンヌとマルセイユに向かった。 当時は飛行機が商業化される前だったので、パリからマルセイユまで列車で移動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この時、崔承喜はパリで「ル・トラン・ブルー(Le Train Bleu)」に乗ったと推測される。 英語では「ブルートレイン」と訳された「ル・トラン・ブルー」は、フランス西北部のカレー(Calais)から東南部のコートダジュール(Côte d'Azu)を斜めに結ぶ特急列車の路線だった。 がフランスのカレーから始まり、パリ、ストラスブール、ミュンヘン、ウィーン、ブダペスト、ブカレストなどを経由しながらヨーロッパを斜めに横断してトルコのイスタンブールに至る急行列車だったのに対し、はカレーから..
[마르세유1939공연] 8. 르트랑 블루 최승희는 1938년 12월24일 르아브르를 경유해서 파리에 도착했고, 1939년 1월31일 파리 살플례옐 공연, 2월6일 브뤼셀 팔레드 보자르 공연을 마치고, 2월 말 칸과 마르세유로 향했다. 당시는 비행기가 상업화되기 이전이므로 파리에서 마르세유까지 기차를 타야 했다. 이때 최승희와 안막은 파리에서 에 탑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영어로는 으로 번역되었던 는 프랑스 서북부의 칼레(Calais)에서 동남부의 코트 다쥐르(Côte d'Azu)를 대각선으로 연결하는 특급열차 노선이었다. 가 프랑스 칼레에서 시작해 파리, 스트라스부르, 뮌헨, 비엔나, 부다페스트, 부카레스트 등을 경유하면서 유럽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에 이르는 급행열차였다면, 는 칼레에서 파리, 리용, 마르세유, 칸, 니스, ..
[マルセイユ1939公演] 8. マルセイユ 1939年3月1日夜9時、崔承喜の朝鮮舞踊公演がマルセイユ・オペラハウスで開かれた。この劇場の正式名称はミュニシパル・オペラ・ド・マルセイユ(Opera Municipal de Marseille)、つまりマルセイユ市立オペラだった。 マルセイユはパリに次ぐフランス第2の都市である。2020年現在、パリのメトロポリタン人口が1千3百万人、マルセイユの人口が188万人、第3の都市リヨンの人口が142万人である。2017年現在、韓國ソウル人口が1千万人、釜山と仁川、大邱がそれぞれ350万人、300万人、250万人であるのと比較すると、首都圏と地方主要都市の人口格差は韓国よりフランスが大きい。 マルセイユの相対的な人口は、崔承喜が公演した1930年代末も今と似たような状況だった。1936年現在、パリ、マルセイユ、リヨンの人口はそれぞれ580万人、84万人、74万人だった。1934年の京城(..
[마르세유1939공연] 8. 마르세유 1939년 3월1일 밤9시 최승희의 조선공연이 마르세유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렸다. 이 극장의 정식이름은 뮈니시팔 오페라 드마르세유(Opera Municipal de Marseille), 즉 마르세유 시립 오페라였다. 마르세유는 파리에 이어 프랑스 제2의 도시이다. 2020년 현재 파리 메트로폴리탄 인구가 1천3백만명이었고, 마르세유 인구는 188만명, 제3의 도시 리용의 인구가 142만명이다. 2017년 현재 서울 인구가 1천만명, 부산과 인천과 대구가 각각 350만명과 300만명, 250만명인 것과 비교하면 수도권과 지방 주요도시의 인구 격차는 한국보다 프랑스가 더 크다. 마르세유의 상대적 인구는 최승희가 공연했던 1930년대 말에도 지금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1936년 현재 파리, 마르세유, 리용의 인..
[マルセイユ1939公演] 7. 安漠に対する誤解 崔承喜の創作と公演活動において安漠の役割が非常に重要だったのは事実だが、その役割はしばしば誇張されたり歪曲されたりした。崔承喜の短髪が安漠の提案だったとか、安漠というペンネームは崔承喜の師匠である石井漠の名前を模倣したものだという記述がそうである。 崔承喜が安漠と結婚したのは1931年5月だったが、崔承喜は1926年8月に自分のトレードマークとなった「前髪のないショートボブカット(short bobcut without bangs)」を始め、1944年7月までこのヘアスタイルを変えなかった。 この時は、崔承喜が舞踊留学を始めて約4ヶ月が過ぎた頃で、1924年にアメリカのダンサーで映画女優のルイーズ・ブルックス(Louise Brooks, 1906-1985)が始めたエジプト王女スタイルのボブカット(bob cut)がその頃日本に上陸し、大流行していた。 崔承喜はルイーズ・ブルックス..
[마르세유1939공연] 7. 안막에 대한 오해들 최승희의 창작과 공연활동에서 안막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역할은 종종 과장되거나 왜곡되기도 했다. 최승희의 단발머리가 안막의 제안이었다든가, 안막이라는 필명은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모방한 것이라는 서술이 그런 것이다. 최승희가 안막과 결혼한 것은 1931년 5월이었지만, 최승희는 1926년 8월에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애교머리 없는 짧은 단발머리(short bobcut without bangs)”를 시작했고, 1944년 7월까지 이 헤어스타일을 바꾸지 않았다. 이때는 최승희가 무용유학을 시작한 지 약 4개월이 지난 시점이었고, 1924년 미국의 무용가이자 영화배우 루이스 브룩스(Louise Brooks, 1906-1985)이 시작한 에집트 왕녀 스타일의 밥컷(b..
[マルセイユ1939公演] 6. 崔承喜の傾向性 京城時代の崔承喜が安漠と結婚した後、彼の現代舞踊作品の傾向性が強化されたと記述した文献は少なくない。例えば、尹致昊は1932年1月30日の日記で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 「1月30日土曜日、とても寒い。妻とメリーと一緒に公会堂に公演-舞踊と單幕喜劇-を見に行った。満州で苦しむ朝鮮人救援募金のため、記者協会の鉄筆倶楽部が主催したイベントだった。 「舞踊家の崔承喜さんと彼の舞踊団が、自分たちをモチーフにしたタイトルで一連の無言劇を披露した。(1)宗教からの自由(Freedom from Religion) (2)土地に飢えた者(Land-hunger) (3)荒れた道(Rough roads) (4)悲しい歌(Sad note) (5)恐れることなく前進(Advance without fear)。このすべてのプログラムは精神と行動において共産主義的(Bolshevic)だった。哀れな女性た..
[마르세유1939공연] 6. 최승희의 경향성 경성 시절 최승희가 안막과 결혼한 후 그의 현대무용 작품의 경향성이 강화되었다고 서술한 문헌이 적지 않다. 예컨대 윤치호는 1932년 1월30일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1월30일 토요일, 매우 추움. 아내와 매리와 함께 공회당에 공연-무용과 단막 희극-을 보러갔다. 만주에서 고통 받는 조선인 구호모금을 위해 기자협회 철필구락부가 주최한 행사였다. “무용가인 최승희양과 그의 무용단이 자신들을 모티브로 한 제목으로 일련의 무언극을 보여 주었다. (1) 종교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Religion) (2) 땅에 굶주린 자(Land-hunger) (3) 거친 길(Rough roads) (4) 슬픈 노래(Sad note) (5) 두려움 없는 진보(Advance without fea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