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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1931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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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1931공연] 15. 춘천공회당의 위치 1931년 2월21일의 최승희 춘천공연이 열린 곳은 이었다. 모든 신문기사들이 그렇게 보도했다. 그러나 그 공회당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마치 ‘뭐, 그런 걸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을까? 춘천에 오면 그게 어딘지 다 알텐데...’하는 투이다. 옛날에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불과 80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지금은 춘천공회당의 건물이 사라진 것은 물론, 그것이 있었던 위치에 대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이런저런 기록이 있었겠지만 일본의 패퇴 이후 벌어진 한국전쟁 통에 춘천은 쑥대밭이 되어버렸고, 과거에 대한 기록들이 대부분 불타버렸던 것이다. 1929년 12월18일의 에 따르면 춘천공회당이 완성되고 낙성식을 가진 것은 1929년 12월15일..
【春川1931公演】 14. 崔承喜舞踊團 1931年2月21日の春川公演に参加した崔承喜舞踊団員は何人ぐらいになっただろうか。 公演プログラムも発見されておらず、各新聞もこれを報道していないため、確認する方法はないが、レパートリーを把握すれば、逆に推論することはできる。 1931年2月26日の『毎日申報』と2月9日の『東亜日報』が明らかにした春川公演(2/21)と釜山公演(2/17-18)のレパートリーを総合すると、春川公演の発表作品は1931年1月10-12日の団成社公演で発表された14作品と一致するものと推定される。 ここに春川公演の初演作品として「エレジーの独舞」が加わり、全部で15作品だった。 その15作品のタイトルと『第3回発表会』で各作品を発表したダンサーを並べると次のようになる。 1部: 1.、2.(崔承喜, 李玉熙, 安貞玉)、3.(張桂星, 安貞玉)、4.(崔承喜)、5.(崔承喜, 研究生數名), 2部: 1..
[춘천1931공연] 14. 최승희 무용단 1931년 2월21일의 춘천 공연에 참가한 최승희 무용단원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공연 프로그램도 발견된 바 없고, 신문들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으니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레퍼토리를 파악된다면 거꾸로 추론해 볼 수는 있다. 1931년 2월26일의 와 2월9일의 가 밝힌 춘천공연(2/21)과 부산공연(2/17-18)의 레퍼토리를 종합해 볼 때 춘천공연의 발표작품은 1931년 1월10-12일의 단성사 공연에서 발표된 14개 작품과 일치할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춘천공연 초연작품으로 가 추가되어 모두 15작품이었다. 그 15개 작품의 제목과 에서 각 작품을 발표한 무용수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부: 1. (최승희, 연구생 일동), 2. (최승희, 이옥희, 안정옥)>, 3. (장계성, 안정옥), 4. (최..
【春川1931公演】 13. レパートリー 崔承喜の春川公演のレパートリーは見つからなかった。 公演プログラムもなく、公演を報道した新聞もその日のレパートリーを全体的に報道しなかった。 ただ、1931年2月26日の『毎日申報』がその日の発表作品の内容といくつかの例を次のように報じた。 「舞踊は,,,,,の3部に分けて15種を演舞して... 完全に観衆の全精神をし、あちこち勝手に引きずり回り、思いっきり魅せてしまった」。 この日公演された作品が「3部に分かれて15種」という点は以前の発表会と似ていた。 1930年11月14日、京城公会堂で行われた「京城女子高学生慈善公演」でも3部14作品が発表され、1931年1月10日、團成社の「崔承喜第3回舞踊発表会」の発表曲も3部の14作品だった。 新聞記事に報道されたレパートリーは6作品だけだが、2月9日の『東亜日報』によると、2月17-18日の釜山公演の発表作品の中には「、、、、、など」が..
[춘천1931공연] 13. 레퍼토리 최승희 춘천공연 레퍼토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공연 프로그램도 없고, 공연을 보도한 신문들도 그날의 레퍼토리를 전체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다만 1931년 2월26일의 가 그날 발표작품의 내용과 몇 가지 예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무용은 , , , , , 등 3부로 나누어 15종을 연무하여 ... 완전히 관중의 온 정신을 하여 이리저리 마음대로 줄줄 끌고 다니며 여지없이 매혹하여 버렸었다.” 이날 공연된 작품이 ‘3부로 나뉘어 15종’이라는 점은 이전의 발표회와 유사했다. 1930년 11월14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에서도 3부 14작품이 발표되었고, 1931년 1월10일 단성사의 의 발표곡도 3부의 14작품이었다. 신문 기사에 보도된 레퍼토리는 6개 작품뿐이지만 2월9일의 에 따르면 2월17-18일의 ..
【春川1931公演】 12. 春川公演の報道 1931年2月21日の崔承喜春川公演の主催は、4紙の春川支局連合だった。 『東亜日報』と『朝鮮新聞』、『京城日報』と『毎日申報』だった。 『東亜日報』が含まれたのは意外だ。 他の3紙は日本語新聞か総督府の機関紙だったためだ。 広告文を除けば、春川公演に関する記事は計6つだった。 いずれも春川発の記事で、中央紙の地方版に掲載された。 春川にも独自の新聞があったなら報道がより詳しくなっただろうが、中央紙の春川発記事は概して簡略だっ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これらの記事を通じて、崔承喜の春川公演の面貌を推し量ることができた。 公演終了後の2月26日の『毎日申報』はこの公演について次のように報じた。 「崔承喜さんの新作舞踊公演会は11日夕方、春川公会堂で開かれたが、開会定刻の1時間前にすでに四方から集まった観衆によって、そのような大きな公会堂も文字通り立錐の余地なくいっぱいになった。 その後、..
[춘천1931공연] 12. 춘천공연 보도 1931년 2월21일의 최승희 춘천공연 주최는 4개 신문 춘천지국 연합이었다. 와 , 와 였다. 가 포함된 것이 뜻밖이다. 다른 세 신문은 일본어 신문이거나 총독부 기관지였기 때문이다. 광고문을 빼면 춘천공연에 대한 기사는 모두 6개였다. 모두 춘천발 기사로 중앙지의 지방판에 실렸다. 춘천에도 독자적인 신문이 있었다면 보도가 더 자세했겠지만, 중앙지의 춘천발 기사는 대체로 간략했다. 그럼에도 이 기사들을 통해 최승희 춘천공연의 면모를 짐작해 볼 수는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인 2월26일의 는 이 공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최승희양 신작무용공연회는 지난 11일 저녁 춘천공회당에서 열렸는데 개회 정각한 시간 전에 벌써 사방에서 운집한 관중으로 인하여 그처럼 큰 공회당도 문자 그대로 입추의 여지없이..
【春川1931公演】 11. 江原道長官李圭完 の咸光福(ハム·グァンボク)記者は、李鮮吉(イ·ソンギル)と李英一(イ·ヨンイル)の父親で、日本植民地時代に初代江原道長官を務めた李圭完(イ·ギュワン, 1862-1946)が、崔承喜の春川公演をあっ周旋した可能性を主張した。 立証資料が提示されていないため、まだ「仮説」である。 しかし、蓋然性は排除できないため、咸光福記者の仮説を検証する準備が必要だ。 まず、李圭完が崔承喜の春川公演を取り持っていたなら、それは可能なことだっただろう。 当時、春川では、日本人と朝鮮人の中で李圭完ほど影響力のある人がいなかったからだ。 彼は江原道長官(1908-1918年)と咸鏡南道長官(1918-1924年)を歴任した後、62歳で春川に引退したが、依然として全国的に有名人だった。 退任後、李圭完は中枢院参議職などの政務職は断ったが、経済と産業、社会活動は継続した。 彼は東洋拓殖会社顧問(192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