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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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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세유 공연] 6. <프로방살>의 최승희 기사 파리의 공연 팸플릿은 어떻게 마르세유에 전해졌을까? 요즘이면 사진을 찍어 문자나 이메일로 보낼 수 있겠지만, 당시는 가장 빠른 통신수단이 전신이었다. 1월31일의 공연 팸플릿의 내용이 3주나 지난 2월24일 신문에 게재된 것을 보면 시간이 촉급했을 리 없고, 더구나 이런 장문의 텍스트가 전신으로 보내졌을 것 같지 않다. 아마도 인편이거나 우편이었을 것이다. 이 팸플릿의 내용을 마르세유에 전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1939년 2월24일의 의 기사가 그 답을 주었다. 이 기사는 의 기사와 똑같았다. 4줄로 작성된 기사 제목도 같았고, 세 문단으로 작성된 기사의 본문도 완전히 같았다. 당시 마르세유 최대부수의 신문 는 공화우파 신문이었고, 부수가 둘째였던 은 공화좌파 신문이었다. 둘 다 공화주의를 표방했으나 성..
[마르세유 공연] 5. <살 플레옐> 공연의 팸플릿 의 1939년 2월24일자 최승희 관련 기사는 상당 부분이 1월31일 파리 공연의 팸플릿을 인용한 것이었다. 이 최승희 공연 팸플릿은 2017년 5-6월 파리 취재 중에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관객에게 배부되기 위해 인쇄되었을 2천여 부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으로, 필자의 대출 신청으로 이 팸플릿은 78년 만에 다시 햇빛을 본 셈이었다. 이 팸플릿의 2쪽에는 최승희와 그의 조선무용를 소개하는 글이 서술되어 있다. 공연이 최승희의 유럽 데뷔 공연이었던 만큼 이 팸플릿은 작품 소개 못지않게 무용가 최승희의 소개와 조선무용의 성립과정을 설명하는 데에도 공을 들였다. 소개문의 전반부는 최승희의 집안 배경과 학력, 무용 입문 동기와 과정, 가족의 반대와 후원, 일본과 미국에서의 성공 등을 간결체로 서술했고,..
[마르세유 공연] 4. 마르세유의 첫 기사 마르세유의 지역 신문 중에서 최승희의 무용 공연을 가장 먼저 보도한 것은 1939년 2월24일자 였다. 이 신문 4면에는 “미국과 파리에서 큰 성공을 거둔 극동의 저명한 무용가 최승희가 다음 주 수요일인 3월1일 저녁 에서 조선무용을 공연한다”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었다. 기사는 이어서 최승희와 조선무용, 그리고 그녀의 세계 순회공연을 소개했고, 마르세유 공연이 프랑스 지방 공연으로서는 첫 번째라고 강조하면서 보도를 끝마쳤다. “유명한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스타인 최승희는 20세기 동안 전해 내려오던 중 사라져버렸던 전통 조선무용을 회생시켰다. 그녀는 옛 민속 무용도 찾아냈다. 한국의 음악도 잊혀져가고 있었다. 최승희는 젊은 작곡자들과 협력하여 이 음악을 되살렸고 그와 함께 조선무용 예술을 회..
[마르세유 공연] 3. 시립 기록보관소 최승희-안막 선생 부부는 1939년 2월23일 프랑스 남부 공연을 위해 파리를 출발했다. 기차를 타고 마르세유를 경유해 2월26일 칸에 도착, 공연을 가진 후, 다시 마르세유로 돌아와 3월1일 극장에서 조선무용 발표회를 열었다. 나는 2017년 5월말 스위스와 이탈리아 조사를 마치고 몬테카를로와 칸을 조사한 후 6월7일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최승희 선생의 여정과는 반대 방향으로 조사를 진행해 나간 것인데, 그것은 내가 최승희 선생처럼 파리에서 출발하지 않고, 암스테르담에서 비행기로 주네브에 도착, 스위스 조사를 먼저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스위스에서 주네브와 로잔느 조사를 마친 후 기차로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와 플로렌스를 조사했다. 그러나 이 도시들에서는 최승희 선생의 공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공연들..
[마르세유 공연] 2. 이상한 일정과 동선 유럽 순회공연 중이던 최승희-안막 부부가 마르세유 공연을 3월1일에 가지기 위해 애썼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든 것은 프랑스 남부도시 공연의 일정과 동선 때문이었다. 최승희 선생은 1939년 2월26일 칸에서 공연을 가졌고, 이어서 3월1일에 마르세유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같은 일정에 대해 들었던 첫 번째 의문은 최승희 선생이 어째서 마르세유보다 칸에서 먼저 공연을 했는가, 였다. 도시의 규모나 문화적 영향력으로 보아 칸은 마르세유에 비견될 수 없다. 오늘날에도 마르세유는 인구 85만명(2013년 센서스 기준)으로 파리(2백22만명)에 이어 프랑스 제2의 도시이다. 같은 기준으로 칸느는 인구가 7만명, 프랑스내 66위이다. 이 같은 차이는 193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차대전 직후인 1946년 인구..
[마르세유 공연] 1. 3월1일 마르세유 조선무용가 최승희 선생은 1939년 3월1일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날 오후9시 마르세유의 최대 극장 에서였다. 나는 이 공연을 조사하기 위해서 2017년 6월7일 마르세유를 찾았고, 시립도서관과 극장을 방문해 84년 전의 이 무용공연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최승희 선생이 마르세유에서 공연했었다는 점은 서울을 출발하기 전부터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해 두고 있었다. 예컨대 최승희 선생은 1939년 7월호에 게재한 서신에서 “3월1일에는 마르세유의 공연” 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 편지에서는 공연 시간이나 장소, 레퍼토리와 현지 반응 등의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평전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카시마 유사부로(高嶋雄三郎)의 와 강이향의 , 정병호의 와 김찬정의 , 그리고..
[대금강산보] 30. 結論: 今も『大金剛山の譜』を求めて 崔承喜の舞踊映画『大金剛山の譜』は、1937年2月17日の京城朝鮮ホテルで開かれた観光協会懇談会で初めて提案され、1939年2月17日のパリ試写会を最後に記録から消えた。 その後50年間『大金剛山の譜』は忘れられた。 初期の評伝の著者も『大金剛山の譜』を知らなかった。 徐萬一(ソ·マンイル)の『朝鮮を輝かせて私』と高嶋雄三郞の『崔承喜(1959)』にもこの映画は言及されず、高嶋雄三郞が『崔承喜(1981)』の裁判を出した時も同じだった。 約10年が過ぎて出版された姜利香(カン·イヒャン)の『生命の踊り·愛の踊り』(1993)も自伝的映画『半島の舞姬(1936)』については比較的長く述べているが、わずか2年後に公開された『大金剛山の譜(1938)』については言及されていない。 評伝の中で初めて『大金剛山の譜』に触れたのは鄭昞浩(チョン·ビョンホ、1995)である。 パリ試写会以来、この映..
[대금강산보] 29. 『大金剛山の譜』のフィルムはどうなったのだろうか。 崔承喜の舞踊映画『大金剛山の譜』は、1939年2月17日のパリ試写会を最後に文献から消えた。 その後、この映画が再び上映されたという記録は発見されなかった。 世界巡回公演期間だけでなく、巡回公演を終えて帰国した後も同じだった。 パリ·サルドイェーナ劇場試写会以後,『大金剛山の譜』のフィルムは,衣装と楽器,小物と蓄音機などとともにシャンゼリゼのスタジオに保管されたに違いない 戦雲が漂うと崔承喜は8月末頃、パリ郊外のバノ城に宿舎を移したが、スタジオはそのまま維持した。 9月1日に戦争が勃発し、日本大使館から避難命令を受けると、崔承喜は宿舎とスタジオを撤収してボルドーに向かった。 第2避難船「カジママル(鹿島丸)」は9月7日、ボルドーに入港したが、巡回公演を続けたかった崔承喜は、乗船を諦め、汽車の便でローマに向かった。 乗り換えのためにマルセイユに降りた崔承喜は、日本領事館からイタリアも参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