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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추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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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20-5. 신문기사와 매장인허증 추도비문은 많은 실마리를 주지 않았지만 핵심 정보를 제공했다. 희생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참여한 공사와 사망한 사고가 기록되어 있었다. 윤길문(尹吉文), 오이근(吳伊根)씨는 옛국철 후쿠치야마(福知山)선 개수공사 중에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했고, 김병순(金炳順), 남익삼(南益三), 장장수(張長守)씨는 고베수도가설공사 중에 터널붕괴사고로 사망했다고 했다.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는 신문기사로 확인되었다. 1929년 3월28일자 과 에 사고 상황과 희생자 명단이 보도되었다. 이번 조사에서 과 의 기사도 추가로 발굴되었다. 전자는 도쿄 소재 일본국가기록원의 기록관리사 쿠누기 에나(功刀恵那)씨가 찾아 주셨고, 후자는 정세화 선생이 고베도서관에서 발굴하셨다.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발굴된 4개의..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20-4. 추도비의 비문 2020년 11월초 2차 무용신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서 나는 비로소 의 주인공들을 찾아 나설 여유가 생겼다. 출발점은 당연히 추도비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추도비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다카라즈카와 고베, 오사카 등지를 취재하러 다녔던 2020년 3월초까지는 추도비가 세워지기 전이었고, 2020년 3월26일 추도비가 세워진 후에는 일본을 방문할 수 없었다. 때마침 불거진 한일 양국의 경제마찰과 양국의 코로나19 방역 정책이 중첩되면서 기존에 자유롭던 한,일 여행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도비가 희생자 조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정세화 선생에게 추도비의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비석의 전,후면과 좌우 측면, 받침대와 상단에 이르기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20-3. <팀아이>와 무용신 2차 캠페인 2020년 3월 초 서울로 돌아온 뒤로 한동안 조선인 추도비를 잊고 있었다. 이미 조사한 최승희 관련 자료들이 상당히 쌓였기 때문에 이를 분류하고 번역해 정리하는 데에 여러 달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정세화 선생은 내가 최승희 자료를 정리하는 것도 도와주셨다. 2018년부터 2년여 동안 일본의 42개 도시에서 수집해온 최승희 관련 자료 중에는 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 많아 흥미로웠지만, 애써 수집한 자료 중의 일부는 제대로 읽거나 해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복사된 자료들 중에는 읽지 못할 정도로 활자가 흐리거나 뭉개진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본이 그런 경우도 있었고 복사가 잘못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체로 1930년대 후반 이후의 신문 기사들은 원본이 좋지 않았는데 이는 1937년 중일 전쟁..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20-2.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찾습니다. 첫 무용신을 선물하기 위해 고베를 방문했을 때 정세화 선생은 내게 자신의 절친 신도 도시유키(신도근동) 선생을 소개하셨다. 신도 선생은 정세화 선생의 부친 정홍영 선생과 함께 지역의 조선인 관련 사적을 답사하면서 연구 활동에 참여했던 분이었다. 고베의 니시노미야 지하호에서 “푸른 봄”과 “조선독립”이라는 벽서를 발견한 것도 정홍영-신도 도시유키 답사조였다. 정세화 선생은 이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거의 준비되었고 3월26일에 세워질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최승희 연구자인 내게 조선인 추도비 이야기를 자꾸 해 주시는 게 조금 의아했다. 그 의문은 고베를 떠나기 전, 정세화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나 식사를 하면서 풀렸다. 내가 시코쿠와 고베, 도쿄와 오사카 등을 방문하면서 동포 분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20-1. <무용신> 캠페인의 시작 2019년 11월 오사카 를 참관하면서 에 대해 처음 들었고, 2020년 1월 고베의 를 참관하면서 자세한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지만, 추도비에 대한 내 역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는 재일 조선학교의 무용부에 점점 끌렸고, 그들이야말로 1930년대에 일본 땅에서 조선무용을 처음 시작했던 최승희 선생의 진정한 후예들이라는 믿음이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이 학생들의 노력에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때마침 두 번의 만남으로 급속히 가까워진 정세화 선생이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정세화 선생이 나의 최승희 연구를 돕는 한편, 나는 조선학교를 도우라고 하신 것이다. 일본 내 인맥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최승희 연구를 돕겠다는 정세화 선생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20-0. 조선인 추도비 건립자들 일본 효고(兵庫)현 다카라즈카(寶塚)시에서 북쪽으로 5킬로미터쯤 떨어진 키리하타(切畑)의 나가오(長尾)산 기슭에는 조선인 추도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옛 국철 후쿠치야마선(福知山線) 폐선 부지에 조성된 벚꽃동산(桜の園) 입구, 신수이(新水) 광장에 세워진 이 비석은 라고 불리고 있다. 이 추도비가 건립된 것은 2020년 3월26일이다. 일제강점 초기인 1910-1920년대에 이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토목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하신 조선인 노동자 5인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현지의 일본인 시민과 재일동포들은 일본 초기 근대화를 위해 치러야 했던 이 분들의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 추도비를 건립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추도비의 전면에는 추도비 주인공들의 이름이 나란히 새..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19-5. 강제동원 피해자 조사 이상의 상황을 고려할 때 김상민 연구사의 설명은 대부분 설득력이 있었다. 경상남도 고성의 8만인구 중에서 이미 1920년대부터 상당한 비율이 일본으로 도항했고, 도항자의 대부분은 남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먼저 도항한 사람들이 주거와 일자리를 찾은 후 다른 가족들을 합류하도록 했기 때문에 노동이민자 수는 더욱 늘어났을 것이다. 윤길문씨의 경우도 아버지 윤재유, 삼촌 , 큰형 윤일선, 형수 여시선, 사촌형 윤창선 등의 가족들과 함께 다카라즈카로 이주하여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에서 터널 굴파 노동에 종사하던 중 사망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사망한 오이근씨도 오이목이라는 사람과 함께 거처하고 있었고, 두 사람의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아마도 형제이거나 적어도 사촌형제였을 것이다. 김상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19-4. 일제강점기 노동이민 앞에서 일제의 국민동원령이 시작된 1938-45년 사이에 약 1백80만명이 군인, 군속, 노무자로 해외로 강제 동원되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약 2천만명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거의 10명 중의 1명꼴로 조선 밖으로 강제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1938년 이후 ‘강제동원’ 피해자이다. 내가 연고를 찾고자하는 윤길문, 오이근씨는 1929년에 사망했으므로 국민동원령이 내려지기 전이었고, 따라서 자발적인 노동이민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여기서 ‘자발적’이란 용어는 ‘강제적’의 상대어로 쓰인 것일 뿐, 당시의 현실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요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첫째는 한일 합방 직후에 시행된 토지조사사업(1910-1918년)때문이었다. 일제의 토지조사는 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