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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14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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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17학교] 46. 남문희 강연 (4) 화약고 남문희 선생의 강연이 끝나고 애프터 자리에서 제가 질문드린 것이 있습니다.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의 수구정부가 아니라, 문재인과 유사한 민주정부가 들어섰다면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지 않았을 수 있을까요? 이는 미국의 중국 봉쇄 의지와 능력이 대한민국 정부의 의지나 능력을 압도할 만큼 강력했는지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다시말해, 한국이 어떻게 나오든지 상관없이, 미국이 이런 방식의 신냉전으로 돌입할 수 있었겠느냐고 물었던 것이지요. 남문희 선생의 대답은 뜻밖에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국 전쟁 이후 미국은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을 추진해 왔지만, 한국 국민의 반일 감정과 한국 정부의 반일 정책 때문에 번번이 실패해 왔다고 합니다. 전두환 때에 일본의 나카소네와 미국의 레이건이 이를 시도했다가 한국..
[대륙17학교] 45. 남문희 강연 (3) 러시아의 재등장 미국이 자국의 경제, 정치적 이익을 위해 중국을 봉쇄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 때, 러시아가 등장합니다. 미국은 미소 냉전에서 승리한 이후 러시아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한때 세계적 패권국가였던 러시아가 그리 만만할 리가 없지요. 썩어도 준치라는 말도 있으니까... 미국의 압력으로 아직은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 미국에 열등한 중국으로서는 누구의 도움에라도 손을 내밀 것은 뻔한 일입니다. 동아시아에서 평화가 교란되는 것을 억지해야 하는 러시아로서는 미국의 압력이 커질수록 여기에 균형을 잡아야할 필요를 느낍니다. 러시아는 2016년 중국에 S-400 미사일과 레이더를 판매한 바 있습니다. S-400 미사일은 미국의 오하이오급 핵잠수함이 발사하는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요격할 능력이 있습니다. 둥펑-21..
[대륙17학교] 44. 남문희 강연 (2) 미국의 중국 봉쇄 2010년 중국의 둥펑-21D 개발이 완료되고 2012는 이를 발표하면서 실전 배치에 들어가자, 공지전투(Air-Land Battle) 개념으로 중국봉쇄를 기도했던 미국의 전략이 무력화됐습니다. 이에 미국은 중국 봉쇄의 대안으로 공해전투(Air-Sea Battle) 전략을 수립했습니다. 항공모함을 이용한 공중공격과 핵잠수함을 이용한 미사일 공격을 합동으로 시도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중국영토를 직접 공격한다는 점에서 핵전쟁을 유발할 수도 있는 위험한 전략입니다. 공해전투 전략에 더해 미국은 중국의 연안에서 중국의 석유수송로를 봉쇄하는 전략을 가동했습니다. 원유가 부족한 중국의 약점을 이용해 석유수송로인 말래카 해협을 차단함으로써 석유공급을, 그리고 파키스탄과 미얀마에서 공급되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도 차단한..
[대륙17학교] 43. 남문희 강연 (1) 미드웨이 해전 11월 마지막 화요일, 저는 일본 취재를 마쳤고, 대륙학교 17기 동문들은 중국 답사를 마친 후 남문희 선생의 강연을 듣기 위해 다시 모였습니다. 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캠프 데이빗과 보스토치니 회동의 배경과 결과를 설명하는 대단히 실제적인 강연이었습니다. 강의든 논문이든, 강연이든 에세이든, 큰 그림과 세부사항을 동시에 서술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큰 그림과 세부사항을 자주 왔다갔다 해야한다면 이해하기가 더더욱 힘들지요. 남문희 선생의 강연은 그 점에서 탁월했다고 생각합니다. 미사일의 종류와 사거리를 설명하자마자 이를 한미일과 북러중 사이의 동아시아 세력판도 변화를 서술하는 데에 활용했던 것은 실로 설득력의 압권이었습니다. 2시간 반에 걸친 남문희 선생의 강연이 끝난 다음, 저는 무서운 느낌이 들었고,..
[대륙17학교] 42. 박환 강연-외전 (5) 커피전문점 카카듀 박환 선생의 강연을 들으면서 많은 질문거리가 떠올랐지만, 내가 손들고 한 질문은 하나였다. 지리멸렬하던 상하이 임시정부가 김구가 국무령(1926)-주석(1927)으로 취임하면서 재건하기 시작했을 때 조선내 연통제를 복구하려는 시도가 있었는가, 였다. 박환 선생은 “뭐든 해보려고 했을 것”이라고는 답변하셨지만, 적어도 문헌으로 나타난 것은 없는 것같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김구 주석은 북중국과 만주의 동포들과 미주 동포들에게 지속적으로 자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던 것을 보면, 국내 연통제 복구는 시도했더라도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1926-1932년 사이의 임시정부 재건과 국내 연락조직 복구 문제를 연결시켜보고 싶었던 것은 “커피전문점 카카듀” 때문이었다. 카카듀는 “조선인이 개업한 최초의 커피전문점”으로..
[대륙17학교] 41. 박환 강연 (4) 상하이 임시정부의 좌우합작 박환 선생의 강연을 통해서 새삼 알게 된 것은 두 가지였다. (1) 대한민국을 민주공화제로 정초했다는 점과 (2) 1919년 9월11일 통합임시정부 수립이 완수되었을 당시에는 좌우합작으로 수립된 정부였다는 점이었다. (1) 민주공화국으로서의 ‘주권재민’을 명시한 임시정부의 헌법은 앞에서 이미 살펴봤지만, 이처럼 주권재민을 헌법에 명시한 나라가 1919년 4월 현재 국제적으로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즉, 민주공화제라는 용어를 헌법에 명기한 나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처음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해 한양대 사학과의 박찬승 교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발간한 역사 교양서 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주공화제라는 용어를 헌법에 명기한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사실상 처음이에요. 19..
[대륙17학교] 40. 박환 강연 (3) 상하이 임시정부의 헌법 상하이 임시정부의 첫 번째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1919.4.11.)”을 기초한 사람은 조소앙이었다.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도 역시 그의 작품이었다. 1919년 3월11일 중국 지린에서 대한독립의군부 주도 아래 독립 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 역시 조소앙이 작성하였다. 그는 이미 두 선언에서 조선 민족의 주권은 소멸하거나 다른 민족에게 양도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대한민주의 자립’을 선포한 바 있었다. 3 · 1 운동이 확산되자 조소앙은 지린에서 상하이로 건너가 헌법을 기초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조소앙은 임시정부 설립의 정당성을 조선인이 직접 행동으로 주권을 행사한 3 · 1 운동에서 찾았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명시한 ‘헌법’인 “임시헌장”을 내놓았다. 전..
[대륙17학교] 39. 박환 강연 (2)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미주 의 무형정부(1912.11.), 연해주 의 대한광복군정부(1914), 베이징 의 민족대동회의(1917.7.),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1919.2.) 등은 모두 삼일만세운동(1919.3.)의 전에 시도된 임시정부들이었다. 대한제국이 망하고 난 직후부터 독립의 열의는 뜨거웠고,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정부에 대한 욕구가 치솟고 있었다는 말이다. 삼일만세운동이 시작되자 이같은 열의와 욕구는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삼일운동은 3월1일에 시작되었으나 적어도 두 달 이상 계속되었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하거나 임시정부를 제안하는 전단들이 뿌려지곤 했다. 1919년 3월3일 발행된 은 곧 임시정부가 조직되고 임시 대통령을 선거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은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발행되던 지하신문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