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 이야기 (78) 썸네일형 리스트형 [マルセイユ1939公演] 14. 朝鮮舞踊家 崔承喜は米国巡回公演中に「日本人舞踊家」と紹介された。 日帝当局が崔承喜を日本の文化使節として利用しようとしたためだ。 日帝が中国で犯した南京大虐殺が米国民に知らされ、大々的な反日感情が起き、日帝不買運動に広がったためだった。 朝鮮出身の崔承喜が米国で朝鮮舞踊を公演し始めたが、彼女が「日本人舞踊家」と紹介されるある不買運動の対象だった。 結局、崔承喜の米国公演は西部で2回、東部で2回行われた後、これ以上続かず、興行会社との巡回公演契約も破棄された。 パリでは様相が違った。 崔承喜が1938年12月24日にパリに到着した時、「日本人舞踊家」という言葉より「極東の舞踊家」という言葉がよりよく使われた。 1月15日の日本大使館主催のレセプション以降は「日本人舞踊家」という言葉が増えたが、1月31日のサル·プレイエル公演以降は「朝鮮人舞踊家」として定着した。 マルセイユではどうだったのだろうか.. [마르세유1939공연] 14. 조선 무용가 최승희는 미국 순회공연 중에 “일본인 무용가”로 소개됐다. 일제 당국이 최승희를 일본의 문화사절로 이용하려했기 때문이다. 일제가 중국에서 저지른 난징대학살이 미국민에게 알려지면서 대대적인 반일 감정이 일었고, 일제불매운동으로 번졌기 때문이었다. 조선 출신의 최승희가 미국에서 조선무용을 공연하기 시작했지만, 그녀가 “일본인 무용가”로 소개되는 한 불매운동 대상이었다. 결국 최승희의 미국 공연은 서부에서 2회, 동부에서 2회 이뤄진 후,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고, 흥행사와의 순회공연 계약도 파기됐었다. 파리에서는 양상이 달랐다. 최승희가 1938년 12월24일 파리에 도착했을 때, “일본인 무용가”라는 말보다 “극동의 무용가”라는 말이 더 자주 사용됐다. 1월15일 일본 대사관이 주최한 리셉션 이후에는 “일.. [マルセイユ1939公演] 13. 「ル·ラジカル」の記事 崔承喜の到着を報道した4つのマルセイユ日刊紙の中で「ル·ラジカル·ド·マルセイユ(Le Radical de Marseille、3面)」が最も長い記事を報道した。 「極東の最も偉大な舞踊家崔承喜との対談」というタイトルのインタビュー記事だった。 ウェゼン·エスカービー(Eug ESCAVY)が筆者として明示されたこの記事を完訳すれば次の通りだ。 「明日(3月1日)夜、市立オペラ劇場で開かれるリサイタルの序幕で、昨日(2月27日)マシュリア·サロンでは、マルセイユ日本総領事の高和さん夫妻が「極東最高の舞踊家」であり「朝鮮最高の美人」崔承喜さんをマスコミに紹介した。 「この女性から真っ先に目につくのは東洋的な顔より彼女の両手だ。 彼女の手はとても薄くてとても長い。 その両手は特別な生命力を持っているように感じられ、飛んでいこうとしたばかりの2羽の白い鳥を連想させる。 「崔承喜さんは(フラ.. [마르세유1939공연] 13. <르 라디칼>의 기사 최승희의 도착을 보도한 4개의 마르세이유 일간지 중에서 가 가장 긴 기사를 보도했다. “극동의 가장 위대한 무용가 최승희와의 대담”이라는 제목의 인터뷰 기사였다. 외젠 에스카비(Eug ESCAVY)가 필자로 명시된 이 기사를 완역하면 다음과 같다. “내일(3월1일) 밤 시립오페라극장에서 열리는 리사이틀의 서막으로, 어제(2월27일) 마실리아 살롱에서는, 마르세유 주재 일본 총영사 다카와 씨 부처가 “극동 최고의 무용가”이자 “한국 최고의 미인” 최승희씨를 언론에 소개했다. “이 여성에게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동양적인 얼굴보다 그녀의 두 손이다. 그녀의 손은 매우 얇고 아주 길다. 그 두 손은 특별한 생명력을 가진 것으로 느껴지는데, 막 날아가려는 두 마리의 흰 새를 연상시킨다. “최승희씨는 (프랑.. [マルセイユ1939公演] 13. マルセイユ·レセプション 崔承喜の到着はマルセイユで大きなニュースだった。 マルセイユの主要4紙が彼女の到着とレセプションを報じた。 2月28日の『ル·プチ·マルセイエ(3面)』はレセプションの写真とともに次のような記事を出した。 「昨日の午後、マシリャ·サロンに高和日本領事夫妻の親切な招請により、社交界の名士たちが多数参加した。 このレセプションは、著名な極東の舞踊家、崔承喜女史を紹介するために開かれたものだ。 「彼女は米国とパリで故国の朝鮮の舞踊を公演し、華やかな成功と高い称賛を受けた。 マルセイユの観客も明日の夕方、「オペラ·ミュニシパル」劇場で、自分の性格と才能を優雅に表現してきた崔承喜に尊敬と喝采を送ることになるだろう」 記事はレセプションが崔承喜をマルセイユに紹介するために日本領事館が主催したものだと明らかにした。 高和博領事夫妻がマルセイユの社交界の名士たち(assistance élégante.. [마르세유1939공연] 13. 마르세유 리셉션 최승희의 도착은 마르세유에서 큰 뉴스였다. 마르세유의 주요 4개 일간지가 그녀의 도착과 리셉션을 보도했다. 2월28일의 는 리셉션의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냈다. “어제 오후 마실랴 살롱에 타카와 일본 영사 부처의 친절한 초청에 따라 사교계 명사들이 다수 참석했다. 이 리셉션은 저명한 극동의 무용가 최승희 여사를 소개하기 위해 열린 것이다. “그녀는 미국과 파리에서 그녀의 고국 조선의 무용을 공연해 화려한 성공과 높은 칭송을 받았다. 마르세유의 관객들도 내일 저녁 오페라 뮈니시팔 극장에서, 자신의 성품과 재능을 우아하게 표현해 온 최승희에게 존경과 갈채를 보내게 될 것이다.” 기사는 리셉션이 최승희를 마르세유에 소개하기 위해 일본 영사관이 주최한 것이라고 밝혔다. 타카와 히로시(高和博) 영사.. [マルセイユ1939公演] 12. マルセイユ到着 崔承喜は1939年2月27日、マルセイユに到着した。 前日の2月26日、カンヌで公演を行い、翌日午前にカンヌを出発して午後にマルセイユに到着、夕方には日本領事館が主催した崔承喜歓迎レセプションに参加し、3月1日市立オペラ劇場で朝鮮舞踊公演を行った。 カンヌ公演の日程は異例だった。 パリ駐在日本大使館が開催した懇談会のためだった。 日本大使館は2月24日午後、パリのオペラハウスの隣の「カフェ·ド·ラ·フェ(Café de la Paix)」で懇談会を開催し、崔承喜はこの懇談会の2部に出演した。 懇談会または討論会と呼ばれたこの会は、名目的にはパリ駐在日本人記者団が主催したと発表されたが、事実上日本大使館が主導した行事だった。 日本大使館に勤務していた海軍武官の澄川正男大佐が「日本の海軍政策」を説明したからだ。 この席では「海南島問題、日ソ漁業問題、グアム島防御問題、中国沿岸封鎖問題など広.. [마르세유1939공연] 12. 마르세유 도착 최승희는 1939년 2월27일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전날인 2월26일 칸에서 공연을 가졌고, 다음날 오전에 칸을 출발해 오후에 마르세유에 도착, 저녁에는 일본 영사관이 주최한 최승희 환영 리셉션에 참석했고, 3월1일 시립 오페라 극장에서 조선무용 공연을 가졌다. 칸 공연의 일정은 이례적이었다. 파리 주재 일본 대사관이 개최한 간담회 때문이었다. 일본 대사관은 2월24일 오후 파리 오페라 하우스 옆의 카페 드라페(Café de la Paix)에서 간담회를 개최했고, 최승희는 이 간담회의 2부 순서에 출연했다. 간담회 또는 토론회라고 불렸던 이 모임은 명목적으로는 파리 주재 일본인 기자단이 주최한 것으로 발표됐는데, 사실상 일본대사관이 주도한 행사였다. 일본 대사관에 근무하던 해군무관 스미카와 마사오(澄川正.. 이전 1 2 3 4 ···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