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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935다카라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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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宝塚1935公演] 7. 須藤五郎 崔承喜の宝塚大劇場公演がある約3ヶ月前、1935年8月10日に大劇場で渡歐送別音楽会を開催した須藤五郎(1897-1988)は非常に特異な人物だった。 当時の他の音楽家たちとは違って、音楽活動の他に社会活動にも積極的に参加したためだ。 須藤五郎は1897年9月14日、三重県鳥羽市で生まれた。 家は代々鳥羽藩の代官を務め、父は鳥羽町の町長を歴任した。  須藤吾郎は幼少期に教会に通いながら賛美歌に心酔し、「音楽で貧しい人々に慰めを与えたい」という願いを持った。 宇治山田中学校を卒業後、1919年4月、今日の東京芸術大学音楽学部の前身である東京音楽学校に入学した。 当時、この学校を受験するには、東京神田一ツ橋にある東京音楽学校の分教場で修学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須藤五郎は朝鮮人学友の兄から朝鮮で起きた三一万歳運動の話を聞いて感動し「音楽学校に落ちたら朝鮮に行く」と言ったりもした。  分教..
[다카라즈카1935공연] 7. 스도 고로(須藤五郞) 최승희의 다카라즈카 대극장 공연이 있기 약 3개월 전, 1935년 8월10일에 대극장에서 도구송별음악회를 개최한 스도 고로(須藤五郞, 1897-1988)는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다. 당시의 다른 음악가들과는 달리 음악활동 외에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스도 고로는 1897년 9월14일 미에현 토바시(鳥羽市)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토바번(鳥羽藩)의 대관(代官)을 지냈고, 아버지는 토바마치의 촌장(町長)을 역임했다.  스도 고로는 어린 시절에 교회에 다니면서 찬송가에 심취했고, “음악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다”는 소원을 가졌다. 우지야마다(宇治山田) 중학교를 졸업한 후, 1919년 4월 오늘날의 도쿄예술대학 음악학부의 전신인 도쿄음악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이 학교에 응시..
[宝塚1935公演] 6.大劇場公演 崔承喜の宝塚大劇場公演が簡単に行われた行事ではないという点を調べたが、果たしてそうだったのかを確認するために宝塚大劇場の公演日程を調査した。 崔承喜が1回目の関西公演を断行したのは1935年10月25日(大阪)と26日(神戸)だった。 もし崔承喜が宝塚大劇場公演を大阪と神戸公演に近く企画したとすれば、その日付は10月25日直前か10月26日直後だっただろう。 ところが、東京2次公演が10月22日だったため、可能な公演日の範囲は10月24日か10月27日に狭まる。  ところが、『宝塚歌劇40年史(1954:103-104)』に収録された1935年9月から11月までの宝塚大劇場の公演日程によると、宝塚少女歌劇団の花組が9月1日から24日まで、月組が9月25日から10月31日まで、そして雪組が11月1日から11月30日まで大劇場公演を続けた。 各公演組が大劇場公演を担当しなかった時には、他の..
[다카라즈카1935공연] 6. 대극장 공연 최승희의 다카라즈카 대극장 공연이 쉽게 이루어진 행사가 아니라는 점을 살펴보았는데, 과연 그러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카라즈카 대극장의 공연 일정을 조사했다. 최승희가 1차 간사이(關西)공연을 단행했던 것은 1935년 10월25일(오사카)과 26일(고베)였다. 만일 최승희가 다카라즈카 대극장 공연을 오사카와 고베공연에 가깝게 기획했다면, 그 날짜는 10월25일 직전이거나 10월26일 직후였을 것이다. 그런데 도쿄2차공연이 10월22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공연일의 범위는 10월24일이거나 10월27일로 좁혀진다.  그런데 다카라즈카가극 40년사(1954:103-104)>에 수록된 1935년 9월부터 11월까지의 다카라즈카 대극장의 공연 일정에 따르면,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의 하나구미(花組)가 9월1일부터 2..
[宝塚1935公演] 5. 宝塚大劇場 崔承喜の宝塚公演が遅れて急造された公演ではないもう一つの理由は、劇場のためだった。 宝塚大劇場は1~2週間前に急に貸館できる劇場ではなかったためだった。  崔承喜が公演した宝塚大劇場は1924年7月に開館した4千席の超大型劇場で、よく初代宝塚大劇場と呼ばれる。 この初代大劇場は、今日の二代大劇場が1992年に武庫川沿いに建てられるまでの68年間、宝塚少女歌劇団の作品が上演されたところだ。  宝塚少女歌劇団は1913年阪急電鉄会社の創始者小林一三(1873-1957)が結成した「宝塚唱歌隊」が母体だ。唱歌隊は同年12月「宝塚少女歌劇養成会」に改称され、1914年4月1日に初公演を行った。 初公演の劇場は宝塚新温泉の室内プールを改造したパラーダイース劇場(500席)だった。  1919年3月、小林一三は「宝塚少女歌劇養成会」の名前を「宝塚少女歌劇団」に変えた。 彼はまた、宝塚の東側に位置す..
[다카라즈카1935공연] 5. 다카라즈카 대극장 최승희의 다카라즈카 공연이 뒤늦게 급조된 공연일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극장 때문이었다. 다카라즈카 대극장은 1-2주 전에 급작히 대관할 수 있는 극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최승희가 공연했던 다카라즈카 대극장은 1924년 7월 개관한 4천석의 초대형 극장으로, 흔히 초대 다카라즈카 대극장으로 불린다. 이 초대 대극장은 오늘날의 2대 대극장이 1992년 무코 강변에 세워질 때까지 68년간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의 작품이 상연된 곳이다.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은 1913년 한큐전철회사의 창시자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 1873-1957)가 결성한 ‘다카라즈카 창가대(宝塚唱歌隊)’가 모태이다. 창가대는 같은 해 12월 ‘다카라즈카소녀가극양성회’로 개칭되었고, 1914년 4월1일 첫 공연을 가졌다. 첫 ..
[宝塚1935公演] 4.演目と舞踊家 大阪公演パンフレットの「二つのリサイタル」は崔承喜と安漠が宝塚公演を「大阪第2回公演」と誤解したという点で解決の糸口をつかんだが、それだけでは十分に感じられなかった。 まだ状況証拠なので、少なくとも一つ以上の交差検証が必要に見えた。  そこで今回は、大阪公演(1935年10月25日)と宝塚公演(11月9日)の演目を比較してみた。 ただ、宝塚公演のプログラムは発見されたことがなく、詳細な比較が容易ではなかった。 演目は広報記事と広告文に並んでいて確認できるが、各演目を上演するダンサーが誰だったのかは確認が難しかった。 1935年11月9日の『大阪朝日新聞(7面)』に掲載された『崔承喜新作舞踊の夜』の広告文に明示された宝塚公演の演目は次の通りである。 [第1部] (1)剣の舞、 (2)無憂華、 (3)民謡調、 (4)金の指の踊、 (5)リリックポエム、 (6)希望を抱いて、[第2部] (1..
[다카라즈카1935공연] 4. 연목과 무용수 오사카 공연 팜플렛의 “두 개의 리사이틀”은 최승희와 안막이 다카라즈카 공연을 “오사카 제2회 공연”으로 오해했었다는 점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직은 정황 증거이므로,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교차검증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사카 공연(1935년 10월25일)과 다카라즈카 공연(11월9일)의 연목을 비교해 보았다. 다만 다카라즈카 공연의 프로그램은 발견된 바 없어서 상세한 비교가 쉽지는 않았다. 연목은 홍보기사와 광고문에 나열되어 있어서 확인할 수 있지만, 각 연목을 상연할 무용수가 누구였는지는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1935년 11월9일의 오사카아사히신문(7면)>에 게재된 최승희 신작무용의 밤> 광고문에 명시된 다카라즈카 공연의 연목은 다음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