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1935다카라즈카 (36) 썸네일형 리스트형 [宝塚1935公演] 18.結び言葉 崔承喜が1933年3月に再び東京に渡り舞踊活動を再開した当時、社交ダンスとレビュー、そして映画の爆発的な盛行で日本の芸術舞踊界は存立根拠を喪失していた。 1910年代に新舞踊を始めた1世代舞踊家たちはすでに構築した基盤で危機状況にもかかわらず舞踊活動を継続することができたが、1世代の大家たちから新舞踊を学んだ新進舞踊家たちは生活と舞踊活動のための根拠を用意することが難しい状況だった。 崔承喜は1934年9月に第1回東京発表会に続き、1935年4月に石井舞踊団から独立した後、このような危機状況で芸術舞踊を続けるための方案を講じ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崔承喜が採択した方法は、概して師匠から学んだ方法だった。 第一に、東京で定期的な芸術舞踊公演を続けながら、これを土台に持続的に地方公演を遂行することだった。 崔承喜は1935年10月22日に第2回東京公演、1936年9月22-24日の第3回.. [다카라즈카1935공연] 18. 맺음말 최승희가 1933년 3월 다시 도쿄로 건너가 무용 활동을 재개했을 당시, 사교댄스와 레뷰, 그리고 영화의 폭발적인 성행으로 일본의 예술무용계는 존립근거를 상실하고 있었다. 1910년대에 신무용을 시작한 1세대 무용가들은 이미 구축한 기반으로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무용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으나, 1세대의 대가들로부터 신무용을 배운 신진무용가들은 생활과 무용활동을 위한 근거를 마련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최승희는 1934년 9월에 제1회 도쿄발표회에 이어 1935년 4월에 이시이무용단에서 독립한 후에 이같은 위기 상황에서 예술무용을 계속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해야 했다. 최승희가 채택한 방법은 대체로 스승으로부터 배운 방법이었다. 첫째, 도쿄에서 정기적인 예술무용공연을 계속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지속적으.. [宝塚1935公演] 17.芸術アイデンティティ 1930年代に迫った芸術舞踊界の危機に対処するための崔承喜の戦略を4つに分けてみた。 (1) 社交ダンスとは距離を置きつつ、(2)映画出演の機会を活用し、(3)レビューとは積極的に交流しながら、(4)芸術舞踊公演を続けていくというものだった。 この中でレビューとの交流は師匠石井漠と差を見せた方案だが、これが崔承喜の危機対応戦略で重要だったと見られる。 芸術舞踊家としての広報と舞踊活動の持続のための収入に肯定的な影響を与えたためだ。 1935年11月9-10日の宝塚大劇場公演と野外舞踊撮影大会で、当時23歳だった崔承喜は自身と年齢帯が同じ男性大卒者初任年俸の1.6倍に達する収益を得て、それと共に宝塚少女歌劇団と肩を並べ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全国的な名声も得ることができた。 一方、崔承喜公演を通じて宝塚少女歌劇団もイメージ向上に助けを得ただろう。 創立者の小林一三は、少女歌劇団が大衆的な娯.. [다카라즈카1935공연] 17. 예술 정체성 1930년대에 닥친 예술무용계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최승희의 전략을 4가지로 살펴보았다. (1) 사교댄스와는 거리를 두되, (2) 영화 출연 기회를 활용하고, (3) 레뷰와는 적극 교류하면서, (4) 예술무용 공연을 계속해 나간다는 것이었다. 이중 레뷰와의 교류는 스승 이시이 바쿠와 차이를 보였던 방안인데, 이것이 최승희의 위기 대응전략에서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술무용가로서의 홍보와 무용활동 지속을 위한 수입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 11월9-10일의 다카라즈카 대극장 공연과 야외무용 촬영대회로, 당시 23세였던 최승희는 자신과 연령대가 동일한 남성 대졸자 초임 연봉의 1.6배에 달하는 수익을 얻었고, 그와함께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전국적인 명성.. 【宝塚1935公演】16.宝塚劇場アトラクション 崔承喜が1935年11月9日、レヴィ公演団である宝塚少女歌劇団の大劇場公演を断行したのは、公演収益と広報効果の極大化を狙ったためだろう。 当時、宝塚は日本人口が7千万人だった時代にも年間1千万人の観光客が訪問する最大観光地であり、したがって宝塚大劇場公演は日本全域を相手に公演する効果があったためだ。 しかし、彼女は宝塚大劇場公演と野外舞踊撮影大会を後日、再び試みたことはない。 おそらく1936年以後、崔承喜はすでに日本最高の芸術家として定着し、芸術舞踊公演だけでも十分な収入と広報効果を継続することができたためだろう。 それなら、崔承喜はその後、レビューとの交流を中断したのだろうか? そうではない。 1935年11月9-10日の宝塚大劇場公演後も、崔承喜は少女歌劇団との交流を続けた。 例えば1936年1月11日付の『京都日出新聞(1面)』の公演広告文によると、崔承喜は1月13日からエノ.. [다카라즈카1935공연] 16. 다카라즈카극장 어트랙션 최승희가 1935년 11월9일 레뷔 공연단인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의 대극장 공연을 단행한 것은 공연수익과 홍보효과의 극대화를 겨냥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다카라즈카는 일본 인구가 7천만명이던 시절에도 연간 1천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최대 관광지였고, 따라서 다카라즈카 대극장 공연은 일본 전역을 상대로 공연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최승희의 다카라즈카 대극장 공연과 야외무용 촬영대회를 후일 다시 시도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1936년 이후 최승희는 이미 일본 최고의 예술가로 자리를 잡았고, 예술무용 공연만으로도 충분한 수입과 홍보효과를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최승희는 이후 레뷰와의 교류를 중단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1935년 11월9-10일의 다카라즈카.. [宝塚1935公演] 15. 宝塚の野外舞踊 崔承喜が師匠である石井漠の娯楽舞踊に対する認識と態度を大部分受け入れたが、レビューに対してだけは師匠と違って開かれた態度を堅持したという点は、彼女がよく野外舞踊を試みたことからも確認できる。 石井漠も劇場を離れて野外舞踊を試みたことはあった。 石井漠舞踊団は1926年7月に東京日比谷野外音楽堂で公演を行ったことがあり、北海道巡回公演の途中だった同年8月には札幌の中島公園の野外舞台で公演したことがある。 しかし、石井漠の野外舞踊は、劇場での舞踊公演を野外舞台に移したという点で、あまり大きな違いはなかった。 しかし、崔承喜の野外舞踊は舞踊公演というよりは野外舞踊写真撮影会で行われたりもした。 すなわち、崔承喜が野外であらかじめ選曲した作品を上演する間、有料入場したアマチュアおよびプロ写真家たちがチェ·スンヒの舞踊動作を自由に写真を撮ることだった。 最初の崔承喜野外舞踊撮影会は1934年8.. [다카라즈카1935공연] 15. 다카라즈카의 야외무용 최승희가 스승 이시이 바쿠의 오락무용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대부분 받아들였지만, 레뷰에 대해서만은 스승과 달리 열린 태도를 견지했다는 점은, 그녀가 자주 야외무용을 시도했던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시이 바쿠도 극장을 벗어나 야외무용을 시도한 적은 있었다. 이시이 무용단은 1926년 7월에 히비야 야외음악당에서 공연을 진행한 바 있고, 홋카이도 순회공연 도중이었던 그해 8월에는 삿포로의 나카지마공원의 야외무대에서 공연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시이 바쿠의 야외무용은 극장에서의 무용공연을 야외무대로 옮겼다는 점에서 그다지 큰 차이점이 없었다. 그러나 최승희의 야외무용은 무용공연이라기보다는 야외무용 사진촬영회로 진행되곤 했다. 즉 최승희가 야외에서 미리 선곡한 작품을 상연하는 동안 유료 입장한 아마.. 이전 1 2 3 4 5 다음 목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