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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이야기

[마르세유 공연] 5. <살 플레옐> 공연의 팸플릿

<르 쁘띠 마르세예(Le Petit Marseillais)>1939224일자 최승희 관련 기사는 상당 부분이 131일 파리 <살플레옐> 공연의 팸플릿을 인용한 것이었다.

 

이 최승희 공연 팸플릿은 20175-6월 파리 취재 중에 <파리 오페라 하우스>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관객에게 배부되기 위해 인쇄되었을 2천여 부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으로, 필자의 대출 신청으로 이 팸플릿은 78년 만에 다시 햇빛을 본 셈이었다.

 

자료 5-1. 최승희의 유럽 데뷔 공연 팸플릿은 <파리 오페라 하우스> 도서관에서 발견됐다. 지하 서고에 잠자고 있던 이 팸플릿의 대출 카드에 아무런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이 팸플릿은 78년만에 다시 햇빛을 본 것이다. Ⓒ조정희

 

이 팸플릿의 2쪽에는 최승희와 그의 조선무용를 소개하는 글이 서술되어 있다. <살 플레옐> 공연이 최승희의 유럽 데뷔 공연이었던 만큼 이 팸플릿은 작품 소개 못지않게 무용가 최승희의 소개와 조선무용의 성립과정을 설명하는 데에도 공을 들였다.

 

소개문의 전반부는 최승희의 집안 배경과 학력, 무용 입문 동기와 과정, 가족의 반대와 후원, 일본과 미국에서의 성공 등을 간결체로 서술했고, 후반부에는 최승희의 일본 활동상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이 소개문의 첫머리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극동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는 고색창연한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태어나 행복하고 열정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14세에 숙명여고보를 졸업했다. 당시 그는 음악을 공부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교장은 그가 가수가 될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고 학교의 장학금으로 도쿄 음악대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지만 나이가 어려 서울에서 1년을 기다려야 했다.”

 

자료 5-2. 2017년의 유럽공연 취재에서 발견된 최승희의 <살 플레옐> 공연 팸플릭. 2쪽에 최승희 소개문이 한쪽 전면에 걸쳐 서술되었다. Ⓒ조정희

 

이어서 소개문은 최승희가 일본의 저명한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고 무용가가 되려는 결심을 했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무용이 하층 계급의 직업이었기 때문에 부모와 친척들이 반대했다는 점, 그러나 최승희는 이에 꺾이지 않고 도쿄로 건너가 이시이 무용 연구소에 들어갔고, 4년간 근대무용의 원리와 기술을 배운 끝에 이시이 무용단의 스타가 되었던 사실을 서술했다.

 

<살플레옐> 팸플릿에 서술된 이상의 내용은 <르 쁘띠 마라세예>의 기사에 인용되지 않았지만, 이후의 후반부는 거의 전재되었다.

 

, “한국의 무용예술은 2천년의 전통을 가졌으나 1930년대에는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고 지적한 것이나, “이를 되살릴 필요를 절감한 최승희가 궁정 무용을 공부하고 민속 무용을 찾아다녔던 사실을 지적하는 한편, “한국 음악도 비슷한 운명에 처한 것을 알게 되어 젊은 음악가들과 협력하여 한국 음악을 부활시키고 이를 자신의 무용에 접목시켰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시작된 최승희의 조선무용은 “1934년 도쿄에 초연되어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무용 비평가뿐 아니라 작가와 배우, 화가와 정치가들까지도 자신들이 받은 감명을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으며, “1934년과 1937년 사이에 최승희는 극동의 각 지역에서 6백여 회의 공연을 가졌고 약 2백만 명이 그의 무용을 감상했다고 전했다.

 

자료 5-3. 1939년 1월31일 파리의 <살 플레옐> 극장에서 열렸던 최승희 무용공연의 팸플릿 표지. Ⓒ조정희

 

이 내용은 <르 쁘띠 마르세예>에도 거의 문자 그대로 인용되었지만, 군데군데 과장이나 오류가 있었다. 예컨대 최승희가 ‘1934-1937년 사이에 2백만 명의 관객 앞에서 6백회 이상의 공연을 펼쳤다는 서술은 과장임에 틀림없다. 19349월부터 193711월까지 38개월 동안 6백회의 공연을 하려면 한 달에 약 16회씩, 즉 이틀에 한 번 이상 공연을 해야 했을 것인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2백만 명의 관객이 6백회 공연을 관람했다면 한 공연의 관객이 평균 33백명이었다는 말이다. 지정 좌석제였던 도쿄 최대 데이고쿠(帝國) 극장의 정원이 1,897, 지정 좌석이 없던 경성 최대 부민관의 정원도 2천명 남짓이었으므로 그 같은 기록은 산술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같은 과장과 오류에도 불구하고 파리 공연의 기록이 마르세유에도 전해졌다는 점이 중요했다. 최승희의 유럽 데뷔공연이었던 <살 플레옐> 공연 팜플렛의 내용이 마르세유 일간신문에 인용되었다는 것은 파리에서 시작된 최승희 현상이 지방으로도 일관되게 확산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jc, 202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