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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이야기

[마르세유 공연] 3. 시립 기록보관소

최승희-안막 선생 부부는 1939223일 프랑스 남부 공연을 위해 파리를 출발했다. 기차를 타고 마르세유를 경유해 226일 칸에 도착, 공연을 가진 후, 다시 마르세유로 돌아와 31<오페라 뮈니시팔> 극장에서 조선무용 발표회를 열었다.

 

나는 20175월말 스위스와 이탈리아 조사를 마치고 몬테카를로와 칸을 조사한 후 67일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최승희 선생의 여정과는 반대 방향으로 조사를 진행해 나간 것인데, 그것은 내가 최승희 선생처럼 파리에서 출발하지 않고, 암스테르담에서 비행기로 주네브에 도착, 스위스 조사를 먼저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스위스에서 주네브와 로잔느 조사를 마친 후 기차로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와 플로렌스를 조사했다. 그러나 이 도시들에서는 최승희 선생의 공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공연들이 기획되기는 했으나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던 것으로 결론내릴 수밖에 없었다.

 

자료 3-1. 최승희는 1939년 3월1일 남부 프랑스 최대도시 마르세유에서 조선무용 발표회를 열었다. 사진은 마르세유 항구.&nbsp;Ⓒ조정희

 

칸 공연 조사를 마친 후 나는 마르세유로 향했다. 마르세유는 직선거리로 칸 서쪽 160킬로미터 지점이다. 철도는 해안선을 따라 굽어 있기 때문에 약 190킬로미터쯤 된다. 르뤼크(Le Luc)에서 라 가르드(La Garde)까지 서남향으로 남하했다가 해안철도를 따라 빙 돌아 남쪽에서 마르세유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치면 대략 부산에서 광양까지 가는 거리다.

 

마르세유 역에 도착해 <시립 기록보관소(Archives Municipales de Marseille)>부터 찾았다. 기록보관소는 마르세유 생 샤를르 (Marsella Saint-Charles) 역에서 1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벨드매(Belle-de-Mai) 지역에 있었고, 도보로 15분쯤의 거리였다.

 

그날의 폐관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숙소에 들르지도 못하고 바로 기록보관소로 향했다. 통역 겸 가이드로 동행한 헬레나와 나는 여행용 가방을 끌면서 기록보관소에 도착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이든 가방을 가지고 입장할 수 없는 것이 기록보관소의 규칙이었다. 인력이 모자라 데스크에서 가방을 맡아줄 수도 없다고 했다.

 

자료 3-2. 2017년 6월, 필자는 마르세유 공연 취재를 위해 <마르세유 시립 기록보관소>를 방문했다. 사진은 시립 기록보관소 입구.&nbsp;Ⓒ조정희

 

이같이 까다로운 출입 규칙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 기록보관소에는 기원전 3세기부터 로마시대와 왕정, 공화정, 제정 시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가 소장되어 있었다. 많은 자료가 양피지나 종이 등 부서지기 쉬운 재질이었으므로, 온도와 습도 조절에 만전을 기해야 했고, 국보급 자료들이 많았기 때문에 도난과 파손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했다.

 

규정에 따르기 위해 우리는 한사람만 입장하고 남은 사람이 로비 한 켠의 휴게실에서 가방을 지켰다. 프랑스어에 능통한 헬레나가 먼저 입장했고 나는 가방을 지켰다. 알프스를 넘어 남프랑스까지 달려와서 찾던 자료를 눈앞에 두고 가방이나 지키게 된 신세가 조금 처량했다.

 

다행히 헬레나는 신속하게 해당 신문 자료들을 찾아냈다. 고신문은 아직 전자화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종이신문을 넘겨가면서 필요한 기사를 골라내야 했는데, 그나마 파리에서 알아낸 공연 일시와 장소 정보가 조사할 신문의 양을 줄여주었고 기사를 찾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자료 3-3. 마르세유 시립 기록보관소에서는 5종의 신문으로부터 30여개의 최승희 공연관련 기사가 발굴됐다. 사진은 1939년 3월24일자 <르 쁘띠 마르세예)> 4면에 실린 최승희 및 공연 소개 기사. prepared by 조정희

 

헬레나가 자기 일을 마치고 나와서 가방을 지키는 동안, 나는 헬레나가 이미 찾아 놓은 신문 자료들을 읽고 필요한 면들을 복사 의뢰했다. 플래시만 쓰지 않는다면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스마트폰으로도 모든 자료를 사진에 담았다.

 

<마르세유 시립 기록보관소>에서는 5종의 신문에서 40여개의 최승희 관련 기사가 발굴됐다. 가장 이른 보도는 1939224일자 <르 쁘띠 마르세예(Le Petit Marseillais)>의 최승희 소개 기사였고, 가장 늦은 보도는 1939918일자 <르 포풀레어(Le Populaire)>의 일본 피난선 하코네마루(箱根丸) 기사였다. 2차 대전이 일어나자 최승희는 이 배로 유럽을 떠났다.

 

<르 라디칼 드 마르세유(Le Radical de Marseille)><르 세마포르 드 마르세유(Le Sémaphore de Marseille)>도 최승희의 마르세유 공연을 보도했는데, 이 기사들은 경성의 <여성>과 파리의 <르 메네스트렐> 기사의 내용을 거듭 확인해 주었다. (2023/2/28, 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