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1934공연 (65) 썸네일형 리스트형 [도쿄1934공연] 9. 대일본연합청년단 일본에는 메이지와 다이쇼 시대에도 지역마다 청년단이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으나, 이때는 주로 청년들의 자기개발과 사회참여를 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봉사단체였다. 1920년대 초 메이지 신궁이 조성될 때 일본청년단도 기금과 노력봉사로 참여했는데, 이에 대해 당시 황태자(=쇼와 텐노)가 감사의 뜻을 전하자, 이들은 그의 뜻을 받들어 1925년 전국의 청년단을 한데 조직한 대일본연합청년단을 결성했다. 1928년 회원 수는 3백만명에 달했다. 이들은 신궁외원에 일본청년관을 건축하기로 결의하고, 전국의 청년단원들이 1인1엔씩 모금하여 그 비용을 충당했다. 마침내 1925년 10월 일본청년관이 완공되어, 문화예술단체들의 공연극장으로 널리 활용되었고, 최승희도 이곳에서 데뷔 공연을 가졌던 것이다. 일본청년단은 원래.. 【東京1934公演】 8.日本青年館 1934年9月20日、崔承喜のデビュー公演を行った劇場は日本青年館だった。 1925年10月に開館した日本青年館は2千人を収容できる大型劇場で、石井舞踊団の研究生たちがデビュー公演をする常連劇場だった。 最初の事例が1928年9月30日にデビュー公演を行った石井小浪だった。 この時は小浪が石井舞踊団を脱退する約1年前だったので、石井漠の後援の下でデビュー公演をした。 崔承喜もまだ研究生だった時期なので、小浪のデビュー公演に参加したはずだ。 その後を継いで石井栄子が1933年9月24日(日曜日)に日本青年館でデビューし、その一年後の1934年9月20日(木曜日)には崔承喜がやはり日本青年館でデビュー公演を開いた。 この前例は、1935年9月27日(金曜日)に日本青年館でデビューした石井みどりと1937年9月21日(火曜日)に日本青年館でデビュー公演を開いた寒水多久茂につながった。 日.. [도쿄1934공연] 8. 일본청년관 1934년 9월20일, 최승희의 데뷔공연을 열었던 극장은 일본청년관(日本靑年館)이었다. 1925년 10월에 개관한 일본청년관은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극장으로, 이시이무용단의 연구생들이 데뷔공연을 하는 단골 극장이었다. 첫 사례가 1928년 9월30일 데뷔공연을 한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이었다. 이때는 코나미가 이시이무용단을 탈퇴하기 약 1년 전이었으므로 이시이 바쿠의 후원 아래 데뷔공연을 했다. 최승희도 아직 연구생이던 시기이므로 코나미의 데뷔공연에 참가했을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이시이 에이코(石井栄子)가 1933년 9월24일(일요일)에 일본청년관에서 데뷔했고, 그 일년 뒤인 1934년 9월20일(목요일)에는 최승희가 역시 일본청년관에서 데뷔공연을 열었다. 이 전례는 1935년 9월27일.. [東京1934公演] 7.男性ダンサーたちのデビュー 石井漠は女性だけでなく男性弟子たちも多数養成した。 しかし、男性弟子の中で石井舞踊団の通過儀礼どおりデビュー公演を行ったのは寒水多久茂だけだった。 他の弟子たちは皆途中で死亡するか、放棄するか、別の道を行った。 石井漠の最も早い時期の同僚で弟子は松浦旅人(1899-1927)は1920年に「東京オペラ座」に加入し、石井漠と初めて縁を結んだ。 その後、彼は石井漠と共に1920年夏の北海道、東北、北陸巡回公演と1921年春の関西、山陽、九州巡回公演、そして1926年2-3月の満州と朝鮮巡回公演にも同行した。 しかし、1928年2月に発行された『石井漠パンフレット第2集』には、松浦旅人が「大阪松竹座で公演中に肺部髄膜炎で倒れて死亡した」という訃報が掲載された。 30歳にもならない年齢で舞踊家としての夢を思う存分咲かせることもなく病死したのだ。 1920年代末、朝鮮人姜弘植(カン·ホンシ.. [도쿄1934공연] 7. 남성 무용가들의 데뷔 이시이 바쿠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 제자들도 다수 양성했다. 그러나 남성 제자들 중에서 이시이무용단의 통과의례대로 데뷔공연을 치른 사람은 칸수이 타쿠시게(寒水多久茂) 뿐이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중에 사망하거나, 포기하거나, 다른 길을 갔다. 이시이 바쿠의 가장 이른 시기의 동료이자 제자는 마츠우라 다비토(松浦旅人, 1899-1927)는 1920년 도쿄오페라좌>에 가입하면서 이시이 바쿠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이후 그는 이시이 바쿠와 함께 1920년 여름의 홋카이도, 도호쿠, 호쿠리쿠 순회공연과 1921년 봄의 간사이, 산요, 큐슈 순회공연, 그리고 1926년 2-3월의 만주와 조선 순회공연에도 동행했다. 그러나 1928년 2월에 발행된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2집>에는 마츠우라 다비토가 “오사카 송죽.. [東京1934公演] 6.通過儀礼 石井漠は自伝的エッセイ集「私の顔(1940)」に収録した「新進舞踊家を語る(1934年10月)」という文で、自分が養成した舞踊家9人を列挙し、短い評価を述べている。 まず、女性舞踊家6人に対する石井漠の評価を見てみよう。 石井小浪は石井漠の義妹で、1922年から石井漠とともに3年間海外巡業に同行し、舞踊の実力が急成長した舞踊家だ。 1929年、崔承喜が石井漠門下を離れる頃、彼女も舞踊団を離れた。石井漠は小浪について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 「石井小浪ー五年前に別れて以来會つたことがないが、昨秋永田氏にすゝめられてその公演會をのぞいた。そして舞踊に對する考へも技巧も一向に進歩のあとがないのを見て驚いた。すべての藝術と同じく舞踊も、安住の中から傑れた作品は生れて来ない。自分自身のためは勿論、敎へ子のためにも奮起する気持はないのか。」 家族であり弟子であり同僚だった小浪に対する石井漠の叙述.. [도쿄1934공연] 6. 통과의례 이시이 바쿠는 자전적 에세이집 나의 얼굴(1940)>에 수록한 “신진무용가들을 말한다(新進舞踊家を語る, 1934년10월)”라는 글에서 자신이 양성한 무용가 9명을 열거하고 짧은 평가를 서술한 바 있다. 먼저 여성 무용가 6명에 대한 이시이 바쿠의 평가를 보자.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는 이시이 바쿠의 처제로 1922년부터 이시이 바쿠와 함께 3년간 해외 순회공연에 동행하면서 무용 실력이 급성장한 무용가다. 1929년 최승희가 이시이 문하를 떠날 무렵 그녀도 무용단을 떠났다. 이시이 바쿠는 코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 - 5년 전 헤어진 이래 만난 적이 없지만, 작년 가을 나가타(永田)씨의 추천으로 공연회를 보았다. 무용에 대한 그녀의 생각과 기교에 전혀 진보의 흔적이.. [東京1934公演] 5.新進舞踊家たち 崔承喜はデビュー公演を断行し石井英子のデビュー公演に刺激を受けたと言ったが、1934年秋の東京舞踊界が全般的に活気を帯び始めたことも大きな要因だっただろう。 新舞踊のブームが起こり始めたので、これに便乗する必要があると判断したのだろう。 『日本洋舞史年表』を見ると、1930年代初め、日本で実際に新舞踊ブームが起きたことが分かる。 各年度の主要新舞踊公演数の推移を見ると、1926年の9件、1927年の8件、1928年の4件、1929年の10件、1930年の8件で1920年代後半には年間10件以下に維持されたが、1931年には14件、1932年の20件、1933年と1934年には25件と大きく増えた。 1930年代の新舞踊ブームは3、4人の先駆者が主導したものだが、そのうちの1人である石井漠(1886~1962)は『私の顔』(1940)で自分を含め、高田雄夫(1895~1929)と高田.. 이전 1 ··· 4 5 6 7 8 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