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이 바쿠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 제자들도 다수 양성했다. 그러나 남성 제자들 중에서 이시이무용단의 통과의례대로 데뷔공연을 치른 사람은 칸수이 타쿠시게(寒水多久茂) 뿐이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중에 사망하거나, 포기하거나, 다른 길을 갔다.
이시이 바쿠의 가장 이른 시기의 동료이자 제자는 마츠우라 다비토(松浦旅人, 1899-1927)는 1920년 <도쿄오페라좌>에 가입하면서 이시이 바쿠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이후 그는 이시이 바쿠와 함께 1920년 여름의 홋카이도, 도호쿠, 호쿠리쿠 순회공연과 1921년 봄의 간사이, 산요, 큐슈 순회공연, 그리고 1926년 2-3월의 만주와 조선 순회공연에도 동행했다.
그러나 1928년 2월에 발행된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2집>에는 마츠우라 다비토가 “오사카 송죽좌에서 공연하던 중 폐부수막염으로 쓰러져 사망했다”는 부고가 실렸다. 30세도 안 된 나이에 무용가로서의 꿈을 마음껏 피워보기도 전에 병사한 것이다.
1920년대 말, 조선인 강홍식(姜弘植)과 한병룡(韓炳龍)이 이시이 바쿠 문하에서 최승희와 함께 무용 수업을 받았으나, 두 사람은 다 영화배우의 길을 가느라 무용을 포기했었다.
1934년 10월에 발표된 이시이 바쿠의 <신진무용가를 말한다>는 글에는 3명의 남성 무용가에 대한 평가가 실렸다. 우선 아라키 요(荒木陽)에 대한 이시이 바쿠의 평은 다음과 같았다.
“아라키 요(荒木陽) - 일찌기 내가 희망을 걸었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쇼치쿠(松竹)소녀가극의 교사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다. 교사로서보다는 실제로 활동하는 무용가의 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충고하고 싶다.”
아라키 요는 1933년 6월9-10일 도쿄 국기관(國伎館)에서 열린 <초여름의 대무용제(初夏の大舞踊祭)> 최승희와 함께 출연한 바 있었다. 따라서 그는 1933년 6월과 1934년 9월 사이에 이시이무용단을 탈퇴, 쇼치쿠소녀가극단의 무용교사로 이적했을 것이다.
당시 이시이무용단에 입단한지 2-3년에 불과해 막내 연구생이었던 칸수이 타쿠시게(寒水多久茂)에 대해 이시이 바쿠는 이렇게 평했다.
“칸수이 타쿠시게(寒水多久茂) - 점프에서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묘미가 있지만, 야노 후미코(矢野文子)군과 마찬가지로 유연한 운동성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프리즘 1933년(プリズム一九三三年)>과 같은 특수한 작품에서는, 보는 사람의 숨을 멈추는 듯한 부드러움을 보일 수 있다. 우리 무용단에는 지극히 중요한 미성품의 한사람이다.”
칸수이 타쿠시게는 이시이무용단의 관례에 따라 1937년 9월21일 일본청년관에서 데뷔 공연을 가졌다. 이시이 바쿠가 <신진무용가를 말한다>에서 언급한 1934년의 제자들 중에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무용가가 되었던 셈이다.
칸수이 타쿠시게는 이시이 미도리와 함께 이시이 바쿠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무용 활동을 계속했는데, 1961년에 열렸던 이시이 바쿠 무용 50주년 기념대회를 손수 조직하는 등 자신의 공연활동 뿐 아니라 스승 이시이 바쿠를 기리는 행사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한편 최승희와 함께 조선인 무용가로 이시이 바쿠의 인정을 받았던 조택원(趙澤元)에 대한 이시이 바쿠의 평가는 짧으면서도 모호하다.
“조택원(趙澤元) - 반도 출신의 남성 무용가로, 가장 촉망받는 한 사람이며, 최승희의 경우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조택원을 “가장 촉망받는” 무용가이며 “최승희와 같은 경우”라고 평가한 것은 일견 긍정적으로 읽힌다. 최승희처럼 “체격이 좋고, 극적 표현력이 뛰어나고, 창작능력도 좋다”는 뜻이라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우선, 이시이 바쿠의 조택원 평가는 그 글에서 언급한 39명의 신진무용가에 대한 평가 중에서 가장 짧은 편이다. 그다지 길게 할 말이 없다는 투로 들린다. 또 이시이 바쿠는 조택원을 평하면서 그의 특징이나 장단점을 직접 거론하지 않고, “최승희와 같은 경우”라고 일축했다. 그다지 성의가 느껴지지 않는 표현이다. 끝으로 이시이 바쿠는 최승희를 “조선의 무용가”라고 불렀던 반면, 조택원은 “반도출신”이라고 서술했다. ‘반도(半島)’는 원래 조선의 별명으로 시작된 말이지만, 시간이 가면서 조선의 비칭으로 전락했다.
사실 이시이 바쿠와 조택원의 관계는 애증이 얽혀 있었다. 이시이 바쿠가 1929년 홍채염으로 실명위기를 맞았을 때 이시이 무용단도 위기를 맞았다. 이시이 바쿠는 치료에 성공해 실명위기를 넘겼지만, 무용단의 위기는 계속됐고, 결국 이시이 코나미는 이시이무용단을 탈퇴했다.
이때 최승희도 무용유학의 계약 조건에 따라 3년의 의무연한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갔는데, 이시이 코나미와 최승희의 탈퇴를 일본과 조선의 언론은 ‘센세이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센세이션에는 조택원도 포함된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지만, 최승희와 함께 조택원도 이시이 무용단을 탈퇴했기 때문이다. 1929년 10월22일자(2면)와 1931년 11월11일자(3면) <경성일보> 기사가 이를 확인해 준다. 그의 탈퇴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경성에 돌아온 조택원은 1930년 한동안 조선극장의 레뷰 담당 시보로 근무했으나 이내 포기하고 1931년 봄에 도쿄로 돌아갔다. 이시이 바쿠의 양해로 무용단에 재입단했으나, 그해 11월 다른 두 명의 연구생 아라키 요(荒木陽)와 야마카와 타카히사코(山川貴久子)와 함께 무용연구소를 개설했다. 스승의 허락을 받고 독립한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무용연구소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못했고 지역의 이름을 따서 <무사시노 무용연구소>라고 간판을 걸었다.
이 무용연구소는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내 폐쇄됐고, 조택원은 다시 경성으로 돌아갔다. 1932년 9월25일 조택원은 이시이 바쿠의 허가를 얻어 경성 혼마치(本町, 오늘날의 서울 명동)에 <이시이바쿠 무용연구소 조선지부>를 개설했다. 여기에도 조택원은 자신의 이름을 걸지 못했고, 이 역시 운영에 실패, 개설한 지 두 달 만에 문을 닫았다.
무용을 계속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해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택원은 이시이무용단의 통과의례로서의 일본청년관 데뷔 공연을 하지 못했다. 마침내 1934년 1월29일 조택원 제1회무용발표회가 열렸지만, 도쿄가 아니라 경성의 공회당이었고, 이시이 바쿠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시이 바쿠의 여동생 이시이 에이코가 이 공연에 참여해 <스페인 야곡>과 <작렬하는 사색>을 발표했지만, 에이코는 1933년 9월에 데뷔공연을 마쳤으므로, 스승 이시이 바쿠의 허락 없이도 자신의 결정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즉, 조택원의 경성 데뷔공연은 이시이 바쿠 문하를 졸업하는 통과의례가 아니라, 자의적으로 조직해서 치른 보통의 공연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조택원의 공연에는 혹평이 뒤따랐다. 1934년 2월10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박철민(朴哲民)의 평론은 조택원의 무용이 “예술창작의 가장 기본적 조건”인 “독자적 창의성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성과를 획득하지 못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상과 같은 조택원의 행적과 이시이 바쿠의 대응을 고려할 때, 조택원을 “가장 촉망받는 한 사람”이며 “최승희와 같은 경우”라고 평가한 이시이 바쿠의 촌평은 오히려 관대한 평가였다. 어쩌면 이시이 바쿠의 평가는 조택원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을 뿐, 스승으로서 조택원이 그 가능성을 성실하게 실현해 나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표현이었을 수도 있다.
끝으로, 이시이 바쿠가 양성한 무용가는 아니지만, 일정 기간 이시이무용단에서 수학했던 박영인, 즉 쿠니 마사미에 대한 이시이 바쿠의 평가를 번역해 두기로 하자.
“쿠니마사미(邦正美) - 2년 정도 전에 내 연구소에 1개월 정도 다녔다. 그 후 미국인 무용가 가넷의 통역을 하면서 무용 쪽도 몇몇 접촉했다고 한다. 지적인 발상이 뛰어나다고들 하기에 작년 가을 발표회를 우시야마 미츠루(牛山充)씨와 함께 들여다보았지만, 무용작품으로서의 형태를 갖추기에는 아직 부족한 수준이다. 항공 이론만으로 비행기가 날지 않듯이, 아이디어만으로 무용이 예술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시이 바쿠의 눈에는 박영인의 무용이 아직 함량미달이었다는 뜻이다. (jc, 2024/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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