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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1934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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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1934공연] 13. 공연1부(1) <황야를 가다(1931)> 최승희 데뷔공연은 3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16개 연목의 19개 작품을 발표하려니 3부 구성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더구나 일본 관객들에게 조선무용 5연목을 한데 모아 발표하기로 했기 때문에, 1부 현대무용, 2부 조선무용, 3부 현대무용의 3단계 구성이 이상적이었을 것이다.  1부 현대무용은 5작품으로 구성되었는데, 첫 작품이 황야를 가다(荒野を行く, 1931)>이다. 이 작품은 이 데뷔 공연에서 초연된 것은 아니다. 1934년 9월13일자 조선일보>와 일본 잡지 영화와연예(映畵と演藝)> 1934년 7월호에도 이 작품의 사진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또 조선의 신여성> 1934년 5월호에는 황야에 서서>라는 작품의 사진이 실렸다. 의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황야를 가다>와 같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東京1934公演】 12.16個連目 崔承喜のデビュー公演では16個作品が上演された。 一公演の作品としては多い方だ。 崔承喜がヨーロッパ巡回公演をする時には、一つの公演を12-13個の作品で構成したりもした。  しかし、プログラムに現れた演目を見れば、崔承喜が実際に公演した作品は10作品であり、残りの6作品は石井漠と石井舞踊団員たちが上演したものだ。 『ポエム』は石井漠の賛助出演作品であり、『小供の世界』1と2、『生命の踊り』、『村の豊作』、『ロマンスの展望』等の5作品にはチェ·スンヒが出演せず石井舞踊団員らが担当した作品だ。  崔承喜のデビュー公演に参加してくれた石井舞踊団は計23人で、彼らの名前は次の通りだ。 彼らの中の一部は後日デビューして舞踊家として活動した人もいるが、この公演を最後に再び名前が登場しない人がほとんどだ。 榎本梢, 加土惠美子, 寒水多久茂, 雁金貞子, 金子かほる, 金敏子, 甲斐富士子, 山崎..
[도쿄1934공연] 12. 16개 연목 최승희의 데뷔공연에서는 16개의 작품이 상연됐다. 한 공연의 작품으로는 많은 편이다. 최승희가 유럽순회공연을 할 때에는 한 공연을 12-13개 작품으로 구성하곤 했었다.  그러나 프로그램에 나타난 연목을 보면 최승희가 실제로 공연한 작품은 10개 작품이고, 나머지 6개 작품은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무용단원들이 상연한 것이다. 포엠>은 이시이 바쿠의 찬조출연 작품이고, 아이의 세계> 1과2, 생명의 춤>, 시골의 풍작>, 로맨스의 전망> 등의 5작품에는 최승희가 출연하지 않고 이시이 무용단원들이 담당했던 작품들이다.  최승희의 데뷔공연에 참가해 준 이시이 무용단은 모두 23명으로 이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이들 중의 일부는 후일 데뷔하여 무용가로 활동한 사람도 있지만, 이 공연을 끝으로 다시 이름이 등장하..
【東京1934公演】 11.プログラム 東京デビュー公演のため、崔承喜は16の作品を準備した。 この演目を収録したプログラムは2種類が伝わっている。 一つは公演当日に配布された小冊子形態のプログラムであり、もう一つはチラシ形式のプログラムだ。  筆者は小冊子を直接見たことがないが、この小冊子を撮った写真は参考にすることができた。 正方形の8面以上で構成されたと見られるこの小冊子の表紙は、笑顔の崔承喜の写真の上にフランス語筆記体で「崔承喜の初めての舞踊詩発表会(Le Première Récital du Poéme de la Dance de Sai Shoki)」とだけ書き、表紙には化粧品広告が載せられた。 小冊子の2ページからは舞踊家の崔承喜と彼女の舞踊作品に対する短い紹介や批評、そして公演を祝う挨拶が載っていた。 寄稿者は評論家の牛山充、音楽家の山田耕莋、舞踊家の石井漠など当代の専門家たちだったが、寄稿文の内容は写真..
[도쿄1934공연] 11. 프로그램 도쿄 데뷔공연을 위해 최승희는 16개의 작품을 준비했다. 이 연목을 수록한 프로그램은 2종류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공연 당일 배포되었던 소책자 형태의 프로그램이고, 다른 하나는 전단 형식의 프로그램이다.  필자는 소책자를 직접 본 적이 없지만, 이 소책자를 찍은 사진들은 참고할 수 있었다. 정방형의 8면 이상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소책자의 앞표지는 웃는 얼굴의 최승희 사진 위에 프랑스어 필기체로 “최승희의 첫 무용시 발표회(Le Première Récital du Poéme de lLa Dance de Sai Shoki)”라고만 썼고, 뒷 표지에는 화장품 광고가 실렸다. 소책자의 2쪽부터는 무용가 최승희와 그의 무용작품에 대한 짧은 소개나 비평, 그리고 공연을 축하하는 인사말들이 실려 있었다...
【東京1934公演】 10.ポスター 崔承喜の『私の自叙伝』(1936)によると、公演日と公演劇場が決まると、現実的な憂慮が始まった。 公演に必要な費用が最も大きな問題であり、作品の振り付けと衣装準備、そして入場券とポスターとプログラムを準備し広報と広告を募集するなどの現実的な問題もあった。  「何よりも先に作品を創ることに専心しましたが昭和九年、秋のシーズンが近くなつた頃には最も難關である軍資金調達といふ峠を突破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安の洋服や時計から、たつた一つ最後まで殘された結婚指環に至るまで凡そお金になりさうなものは悉く賣り拂つてしまひましたが、それで出来上つた金額といふものは五十圓、これではどうにもなりません、 「幸ひに安の月謝として國元から送金して来た百圓を思ひ切つてこれに加へて都合百五十圓、これが私達が底を叩いて作り上げた天にも地にも代へ難い公演會の費用だったのです。」  1934年の150円は2..
[도쿄1934공연] 10. 포스터 최승희의 나의 자서전(1936)>에 따르면 공연날짜와 공연극장이 결정되자 현실적인 우려가 시작됐다. 공연에 필요한 비용이 가장 큰 문제였고, 작품의 안무와 의상 마련, 그리고 입장권과 포스터와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홍보와 광고를 모집하는 등의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작품 창작에 전념했지만, 1934년 가을 시즌이 다가올 무렵 가장 큰 난관은 군자금 조달이었고, 그 고비를 돌파해야 했습니다. ... 남편의 양복과 시계에서부터 마지막까지 남겨둔 결혼반지에 이르기까지 돈이 되는 물건을 모두 팔았습니다. 그래서 모은 금액이 겨우 50원, 이래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남편의 월사금으로 고향에서 송금해 온 1백원을 변통해서 더하니 모두 1백50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밑바닥..
【東京1934公演】 9.大日本連合青年団 日本には明治と大正時代にも地域ごとに青年団が組織され活動していたが、この時は主に青年たちの自己開発と社会参加を目的とする純粋な奉仕団体だった。  1920年代初め、明治神宮が造成された時、日本青年団も基金と努力奉仕で参加したが、これに対して当時の皇太子(=昭和天皇)が感謝の意を伝えると、彼らは1925年に全国の青年団を一つに組織した大日本連合青年団を結成した。 1928年にその団体の会員数は300万人に達した。 彼らは神宮外苑に日本青年館を建築することを決議し、全国の青年団員が1人1円ずつ募金してその費用を充当した。 ついに1925年10月、日本青年館が完工し、文化芸術団体の公演劇場として広く活用され、崔承喜もここでデビュー公演を行ったのだ。  ボランティア団体だった日本青年団は、日帝軍国主義が勃興し、急速に官辺団体に変質した。 日帝が1931年に日帝が満州を侵略し、1937年に日中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