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1934공연 (65) 썸네일형 리스트형 [도쿄1934공연] 5. 신진 무용가들 최승희는 데뷔 공연을 단행하면서 이시이 에이코의 데뷔 공연에 자극을 받았다고 했지만, 1934년 가을의 도쿄 무용계가 전반적으로 활기를 띄기 시작한 것도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신무용의 붐이 일기 시작했기 때문에 여기에 편승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일본양무사연표>를 보면 1930년대 초반 일본에서 실제로 신무용 붐이 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각 년도의 주요 신무용 공연 수의 추이를 보면 1926년의 9건, 1927년 8건, 1928년의 4건, 1929년의 10건, 1930년의 8건으로 1920년대 후반에는 연간 10건 이하로 유지되었으나, 1931년에는 14건, 1932년의 20건, 1933년과 1934년에는 25건으로 크게 늘었다. 1930년대의 신무용 붐은 서너 사람의 선구자가 주도한.. [東京1934公演] 4.石井英子 崔承喜が1934年秋「デビュー公演」を決心したのは当時の日本舞踊界の雰囲気が活発になったためだった。 そのきっかけは石井舞踊団の同僚石井英子の発表会だった。 これについて崔承喜は『私の自叙伝』(1936:127)でこのように述べている。 「石井先生門下であり、先生の妹さんの今は亡くなった石井榮子さんが第一回の發表會を開きました。その結果は非常に好評で榮子さんは振付の才能を一般から高く認められました。この發表會はこれ迄沈滞してゐた舞踊界の空氣を突き破つて新人舞踊家が續々として輩出して来さうな何となく新鮮た潑刺とした気配が醸成されて来たのです。 「自分自身の藝術の創作といふものに對しては貧困と闘びながらも日に日に燃えるやうな野心と熱情とにハチ切れさうになってゐた私が‘なんでこの気配に鈍感でゐられるでせうか。」 崔承喜は直ちに夫の安漠と相談した後、師匠石井漠の許諾を得て発表会を推進したが.. [도쿄1934공연] 4. 이시이 에이코 최승희가 1934년 가을 ‘데뷔공연’을 결심한 것은 당시 일본무용계의 분위기가 활발해졌기 때문이었다. 그 계기는 이시이무용단의 동료 이시이 에이코의 발표회였다. 이에 대해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1936:127)>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이시이 선생의 문하생이며, 선생의 여동생인, 지금은 돌아가신 이시이 에이코 씨가 제1회 발표회를 열었습니다. 그 결과는 매우 호평이었고 에이코씨는 안무의 재능을 일반에게 높게 인정받았습니다. 이 발표회는 지금까지 침체되어 있던 무용계의 분위기를 깨뜨렸고, 신인 무용가가 속속 배출되고 있다는 신선하고 발랄한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가난과 싸우면서도 자신의 예술 창작에 대해서는 나날이 불타는 야심과 열정에 달아올라 있었던 내가 이러한 분위기에 어떻게 둔감할 수 있었겠습니까.. 【東京1934公演】 3.苦難の行軍と新たな出発 1934年9月、崔承喜は22歳に過ぎなかったが、20回以上の主要公演に出演した6年経歴の舞踊家だった。 朝鮮と日本の地方公演を合わせると、彼の公演経験は100回を上回ったはずだ。 1939年1月31日、パリのサルプレイエル劇場で開かれた崔承喜のヨーロッパ初公演プログラムは「1934年と1937年の間に崔承喜は極東各地域で600回余りの公演を行い、約200万人が彼の舞踊を鑑賞した」と叙述した。 パリのガルニエ·オペラハウス図書館でこのパンフレットを78年ぶりに再発掘した筆者は、この紹介文を読みながら「誇張」だと思った。 4年間600回の公演なら1年に150回で、休まず週に3回ずつ公演したという意味だ。 累積観客が200万人だったとすれば、1回平均3300人が各公演を観覧したという話だ。 これが可能なことだったのか、疑わざるを得なかった。 しかし1936年3月10日に発行された「崔承喜.. [도쿄1934공연] 3. 고난의 행군과 새출발 1934년 9월 최승희는 22세에 불과했지만 20회 이상의 주요 공연에 출연한 6년 경력의 무용가였다. 조선과 일본의 지방 공연을 합하면 그의 공연 경험은 1백회를 상회했을 것이다. 1939년 1월31일 파리 살프레옐 극장에서 열린 최승희의 첫 유럽 공연 프로그램은 “1934년과 1937년 사이에 최승희는 극동 각 지역에서 6백여 회의 공연을 가졌고 약 2백만 명이 그의 무용을 감상했다”고 서술했다. 파리 가르니에 오페라하우스 도서관에서 이 팜플렛을 78년만에 재발굴한 필자는 이 소개문을 읽으면서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4년간 6백회의 공연이라면 1년에 150회이고, 쉬지 않고 일주일에 3번씩 공연했다는 뜻이다. 누적 관객이 2백만명이었다면 1회 평균 3천3백명이 각 공연을 관람했다는 말이다. 이게 가능.. 【東京1934公演】 2.デビュー公演 崔承喜は『私の自叙伝(1936)』で1934年9月20日の第1回東京発表会を「デビュー」と呼んだが、これは意外な叙述だ。 崔承喜はその前にも朝鮮と日本で多くの公演をしたからだ。 フランス語の「デビュー(debut)」は日本語でよく「初舞臺」または「處女公演」と訳される。 崔承喜は8年前の1926年に初舞台で処女公演に出演したと報道されている。 1926年6月27日付の『京城日報(2面)』だった。 「石井漠に弟子入りした、淑明女學校出身の崔承子(=石井爆がつけた崔承喜のニックネーム)は、22日東京邦樂座の處女公演に、鮮かな舞姿をみせて、江戶ツ子をうならせたが.... 寫眞は初舞臺で「魚の舞」を踊つてゐる崔承子.」 この報道によると、崔承喜の「デビュー」は1926年6月22日の邦楽座公演だった。 しかし、これは誤報だった。 1926年6月13日付の『大阪毎日新聞(9面)』によると、東京.. [도쿄1934공연] 2. 데뷔 공연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1936)>에서 1934년 9월20일의 제1회 도쿄발표회를 “데뷔”라고 불렀는데, 이는 뜻밖의 서술이다. 최승희는 그 전에도 조선과 일본에서 숱한 공연을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어 ‘데뷔(debut)"는 일본어로 흔히 “초무대(初舞臺)” 또는 “처녀공연(處女公演)”으로 번역되곤 했다. 최승희는 8년 전인 1926년에 초무대에서 처녀공연에 출연했다고 보도된 바 있다. 1926년 6월27일자 경성일보(석간2면)>였다. “이시이 바쿠의 제자로 들어간 숙명여학교 출신의 최승자(崔承子=이시이 바쿠가 지어준 최승희의 별명)는 (6월)22일 도쿄 호가쿠자(邦樂座)의 처녀공연에 출연... (사진설명) 초무대에서 물고기춤(魚の舞)>을 추는 최승자.” 이 보도에 따르면 최승희의 “데뷔”는 1926년.. 【東京1934公演】 1.台風室戸 1934年9月、台風「室戸」が日本に上陸した。 9月15日にフィリピン東部の海上で発生した室戸は、9月21日午前5時頃、四国島·高知県の室戸岬に上陸した。 台風室戸は、四国を横断して岩治島を通過した後、9月21日午前8時頃、神戸と大阪の間の尼崎に再上陸し、その日の午後、京都を貫通して大きな被害を与えた。 室戸台風による死者が2千702人、行方不明者が334人、負傷者が約1万5千人だった。 阪神地域の被害は甚大だった。 4メートル以上の津波で大阪湾沿岸が浸水した。 今でもJR尼崎駅の南口に建てられた当時の浸水高さを示した柱によると、大阪基準面(Osaka Peil)より5メートル10センチ高かった。 避難できなかった溺死者が1千900人に達した。 室戸台風が関西地域に上陸した当時の風速は秒速60メートルの強風であり、このため約9万3千軒の家屋と建物が破損し、沈没したり破損した船舶が.. 이전 1 ··· 5 6 7 8 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