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쿄1934공연

[도쿄1934공연] 13. 공연1부(1) <황야를 가다(1931)>

최승희 데뷔공연은 3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16개 연목의 19개 작품을 발표하려니 3부 구성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더구나 일본 관객들에게 조선무용 5연목을 한데 모아 발표하기로 했기 때문에, 1부 현대무용, 2부 조선무용, 3부 현대무용의 3단계 구성이 이상적이었을 것이다.

 

 

1부 현대무용은 5작품으로 구성되었는데, 첫 작품이 <황야를 가다(荒野, 1931)>이다. 이 작품은 이 데뷔 공연에서 초연된 것은 아니다. 1934913일자 <조선일보>와 일본 잡지 <영화와연예(映畵演藝)> 19347월호에도 이 작품의 사진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또 조선의 <신여성> 19345월호에는 <황야에 서서>라는 작품의 사진이 실렸다. 의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황야를 가다>와 같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 기사는 또 <황야에 서서>1934512<이시이무용단 봄 공연(히비야공회당)>에서 재발표될 예정이지만, 사실 이 작품은 1931년의 작품이라고 서술했다. 이에 경성시절 공연 목록을 살펴보니, <황야에 서서>193151일 단성사에서 열렸던 <3회신작공연 최승희무용회>에서 초연되었다.

 

 

한편, 도쿄 데뷔 공연 프로그램에는 <황야를 가다>가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해설되었다.

 

1. 황야를 가다(荒野), 바르토크 작곡, 최승희

처녀지를 개척하는 사람의 정조... 최승희 특유의 극적 박력이 넘치는 작품

 

바르토크의 음악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수백 곡이 넘는 바르토크 벨라(Bartók Béla Viktor János, 1881-1945)의 작품 중에서 어떤 곡을 선택했는지 명시되지 않았다. 이 작품의 제목에 황야(荒野)’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을 실마리로, 그의 전 작품을 조사해 보았다.

 

 

바르토크의 피아노 곡집 중에 <피아노 첫걸음(The First Term at the Piano, 1913, 1923)>이라는 소품 모음집이 있다. 어린이들이 피아노를 배울 때에 한 손 연습이 되자마자 두 손으로 멜로디를 연습할 수 있도록 작곡, 혹은 편곡된 작품들이다.

 

<피아노 첫걸음>1913년에 출판됐고, 1929년에 개정됐는데, 1913년판에는 18, 1929년판에는 23곡이 실려 있다. 1913년판의 7번째, 1929년판의 10번째곡이 같은 곡으로, 헝가리 민요를 편곡한 것이다. 여기에 <황야의 모험(Wilderness Adventure)>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바르토크는 이 곡의 빠르기를 모데라토로 정하고 사분음표를 1분에 52회의 속도로 연주하도록 표시해 놓았다. 그대로 연주하면 느리다는 느낌을 주는데도 자꾸 듣다보면 왠지 중독성이 있는 멜로디이다. 마치 한국의 아리랑과 비슷하다.

 

모데라토로 연주하면 <황야의 모험>의 연주에 약 1분쯤 걸린다. 최승희가 이 노래로 <황야를 간다>를 안무했다면, 원곡을 그대로 사용했을 리 없다. 당시 무용시라고 불리던 신무용 작품은 짧으면 3, 길면 5분 정도였다. 따라서 최승희는 이 멜로디를 빠르기와 세기를 조정하거나 조를 바꿔 반복하면서 3-5분이 되도록 편곡했을 것이다. 편곡자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 작품이 최승희 특유의 극적 박력이 넘치는 작품이라고 서술된 것을 보면, 처음에는 느리더라도 후반부는 빠르고 힘차게 진행되면서 무용동작들도 그에 맞게 안무되었을 것이다.

 

<황야를 가다>처녀지를 개척하는 사람의 정조를 주는 작품이라고 해설되었다. 이 해설은 물론 최승희가 붙였을 것이다. 안무가이자 실연자인 최승희가 직접 이렇게 해설한 것을 보면 그것이 곧 이 작품을 연기하는 자기 자신의 정조라는 뜻이겠다.

 

 

, 최승희는 자기 자신이 처녀지, 즉 황야를 개척하는 느낌으로 이 작품을 준비하고 연기했는 뜻이다. 처녀지란 사람들이 가보지 않은 땅이다. 그 처녀지가 황폐한 들판이라고 하니, 얼마나 막막할 것인가. 또 황야를 일구어 옥토로 바꾸어놓는다면 얼마나 보람이 클 것인가.

 

 

<황야를 가다>1부의 첫 작품이자, 도쿄에서 본격적인 무용 활동을 시작하는 첫 작품이었다. 최승희는 이 작품을 첫 연목으로 선택함으로써 신무용과 조선무용을 개척하는 선구자로서 예상되는 난관과 그것을 돌파하겠다는 각오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리라. (jc, 2024/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