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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1934공연

[도쿄1934공연] 10. 포스터

최승희의 <나의 자서전(1936)>에 따르면 공연날짜와 공연극장이 결정되자 현실적인 우려가 시작됐다. 공연에 필요한 비용이 가장 큰 문제였고, 작품의 안무와 의상 마련, 그리고 입장권과 포스터와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홍보와 광고를 모집하는 등의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작품 창작에 전념했지만, 1934년 가을 시즌이 다가올 무렵 가장 큰 난관은 군자금 조달이었고, 그 고비를 돌파해야 했습니다. ... 남편의 양복과 시계에서부터 마지막까지 남겨둔 결혼반지에 이르기까지 돈이 되는 물건을 모두 팔았습니다. 그래서 모은 금액이 겨우 50, 이래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남편의 월사금으로 고향에서 송금해 온 1백원을 변통해서 더하니 모두 150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밑바닥까지 긁어모은 전부였고,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대신하기 어려운 공연회의 비용이 되었습니다.”

 

 

1934년의 150엔은 2015년 현재 임금기준으로 약 3741달러에 해당한다. 한국 원화로는 5백만원 정도이니 턱없이 모자라는 액수였지만, 그것으로 공연을 치러야 했다. 공연비용의 문제가 간신히 해결되고도 준비할 것이 산적해 있었다. 작품과 연습, 의상은 최승희가 준비해야 했지만, 홍보와 실무는 남편인 안막이 대부분 담당해야 했다. 대행사에 외주를 줄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는 둘이서 일을 분담하여 짐작가는대로 찾아 돌아다니면서, 입장권을 주문하고, 홍보용 사진을 찍고, 내가 직접 가서 포스터의 제휴 광고를 찍었고, 밤에는 밤대로 김민자(제자)와 함께 승자()를 돌보면서 의상을 바느질하고, 안무를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어렵사리 준비된 최승희의 데뷔공연 작품들의 영상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나마 몇 장의 사진이나마 남게 된 것은 팜플렛과 포스터, 홍보용 전단지 덕분이다.

 

90년의 세월이 지나고 난 지금은 그것도 거의 다 흩어지고 사라졌지만, 인터넷 경매사이트에는 가끔씩 출품되어 고가에 거래되기도 한다. 예컨대 상태가 좋은 최승희 데뷔공연 포스터는 5백만원이 넘는다. 세월을 이긴 포스터 한 장의 가격이 최승희의 공연비용 총액에 맞먹는다.

 

 

최승희 데뷔공연 포스터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대단히 세련되었기 때문이다. 46(오늘날의 B6) 크기의 포스터는 전체가 직선면 위주로 구성되어 단정한 느낌이지만, 이를 배경으로 곡선 위주의 최승희 사진이 대비를 이루면서 단조로움을 피했다. 배경의 그러데이션(gradation)도 우아한 편이고, 이를 바탕으로 배치된 문자들도 꼭 필요한 정보만 전달하고 있어서 복잡하지 않고 깔끔하다. 폰트도 명조체가 주를 이루지만 시간과 장소는 고딕체로 강조했다.

 

당시의 공연 포스터들과는 달리 최승희의 포스터는 연도와 요일도 명시했다. 공연일이 평일(목요일)이기 때문에 강조할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연도 표기도 서력으로 “1934이라고 썼는데, 일본연호 쇼와9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일본 신민이 아니라는 뜻이다.

 

 

더욱 특이한 것은 프랑스어다. 포스터의 오른쪽 상단에 “Le Première Récital pour la Dance Poétic de SAI SHOKI”라고 쓴 것은 최승희의 첫 번째 무용시 발표회라는 말이다. ‘무용시라는 말을 명시함으로써 스승 이시이 바쿠와의 연대를 강조하면서도, 이를 프랑스어로 처리함으로써 일정한 거리도 둔 셈이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독일어와 영어가 우대되었던 점을 생각하면 프랑스어를 사용한 것은 뜻밖의 발상이다. (다만 무용시를 dance poetic이라고 쓴 것은 오기이다. ‘시적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형용사는 Poétique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의외는 최승희의 사진이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고, 화면의 균형을 위해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쳐 배치한 것도 좋다. 하지만 최승희의 모습이 청소년처럼 보이는 것이 뜻밖이다. 최승희의 통상적인 이미지는 키가 크고 몸매가 늘씬한 것으로 정형화되어 있었는데, 이 사진은 딴판이다. 이 역시 보는 이들의 의표를 찌르기 위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아쉽지만 이 포스터를 디자인한 사람과 사진을 찍은 작가가 누구인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하지만 훌륭한 디자인에 깔끔하고 깜찍한 인물 사진인 것만은 사실이다. (jc, 2024/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