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은 “일본 국가의 조선 민족”으로 요약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일률적이지는 않았다. 최승희가 유럽에 체재하는 동안 보도된 프랑스어 신문들의 서술을 보면 크게 세 가지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조선을 일본과 동일시하는 시각이었다. 1939년 2월6일자 <르 피가로(Le Figaro, 4면)>에는 네덜란드 무용가 다르자 콜라인(Darja Collijn)과 최승희를 비교하는 평론이 실렸다. 평자는 다르자 콜라인을 ‘운하와 풍차의 나라에서 온 무용 선교사’로, 최승희를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에서 온 무당(=제사장)’으로 소개했다.
“운하와 풍차의 나라”가 네덜란드를 가리켰던 것은 분명하지만,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는 조선이 아니라 일본을 가리킨다. 당시 유럽에서는 조선을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부르는 관행이 이미 존재했다. 따라서 <르 피가로>의 평자는 최승희를 일본인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둘째, 일부 지식인들은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상황을 알고 있었다. 1939년 1월22일자 <르앵트랑지장(L‘Intransigeant, 6면)>은 일본 대사관의 최승희 리셉션을 보도했는데, “(최승희가) 일본 민족이 아님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으며 “그녀는 조선인으로서 ... 몽골 민족에 가까웠다”고 서술했다. 겉모습만으로도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별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 기자는 “조선이 약 30년 동안 일본에 합병(annexée)”되었지만, “(요타로 스기무라) 대리대사와 미야자키 부인이 이 무용가를 ‘동포(compatriote)’로서 따뜻하게 환영했다”고 덧붙였다.
조선과 일본 간의 불행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일제 공관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양자가 서로의 목적을 위해 협력해야 했던 점을 생각하면, 일제 공관이 리셉션을 열어주고, 거기에 참석한 최승희가 대사관에 감사를 표시하는 것은 당연했다.
셋째, 유럽의 지식인들 중에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관계가 지속적인 갈등관계임을 아는 사람도 있었다. 파리의 무용 평론가 모리스 상펠(Maurice J. Champel)은 1939년 2월25일자 <파리 수와(Paris Soir, 13면)>에 기고한 평론을 통해, <살플레옐> 공연에서 최승희는 “(일본 고위관리들에 의해 조성된 전체주의적)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때로는 고혹적이고 때로는 깜찍한 모습으로 1천년 전통의 조선무용을 선보였다”고 서술했다.
그는 또 최승희가, 이탈리아가 티롤을 강점하듯 조선을 강점한 일본에 대한 개인감정을 분리시킨 채, (공연을 통해) 외향적이고 폭발적인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했다고 전했다. 일차대전 승전국이었던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 영토였던 티롤을 병합했고, 무솔리니는 티롤에서 독일어를 폐지하고 이탈리아어를 쓰도록 강요하는 등의 강압적인 동화정책을 펴고 있었다.
모리스 상펠은 조선의 상황이 티롤과 유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인 최승희가 전체주의 지배자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접어둔 채 1천년 역사를 가진 조선무용을 활발하고 유쾌하게 공연했던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독자들에게 이를 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 유럽, 특히 프랑스의 언론인들의 조선 인식은 다양했다. 조선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이해하는 인식에서부터, 강제적 합병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합병 이후 30년이 지난 당시까지도 저항과 탄압이 계속되는 상황까지 이해하던 언론인도 있었다.
이같은 상황 인식은 미국과는 매우 달랐다. 미국에서는 일본의 중국 침략과 난징 대학살이 알려지면서 촉발된 일본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이 일제불매운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일본의 동맹국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이 있었고,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와 영국 등은 자신들의 이해가 손상되지 않는 한, 추축국의 약진을 묵인하는 것이 대세였다.
유럽인들은, 평화적 공존이든 대립적 갈등이든, 조선과 일본을 부분과 전체로 보았고, 그 때문에, 일본제국의 주도권을 인정하되 조선민족의 저항권도 인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제 공관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주도권을 인정받는 것에, 최승희는 민족예술의 홍보를 보장받는 것에 각각 만족했을 것이다. (2023/3/4,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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