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은 최승희와 일제당국의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기획되었다. 일제 당국은 악화되는 미주와 서유럽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최승희를 문화사절로 활용하고자 했고, 최승희는 조선무용을 세계에 알리고 자신도 정상급 무용가로 자리 잡고 싶었다.
따라서 최승희와 일제 당국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도움을 주고받아야 했다. 최승희는 일본 여권으로 여행하면서 일본의 문화사절로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일제 당국은 최승희의 공연을 지원하면서 그가 조선인 무용가로 홍보되는 것을 용인해야 했다.
그런데 이러한 타협과 양보에도 넘지 못할 선이 있었다. 최승희는 일본 제국을 비난할 수 없었고, 일제는 최승희 공연의 내용, 즉 조선무용에 대해 간섭할 수 없었다. 일제가 공연 내용에 간섭한다면 최승희는 세계 순회공연을 할 이유가 없었다. 또 최승희가 일제를 비난한다면 문화사절은커녕 배일분자로 규정되어 즉각 일본으로 소환되어야 했다.
최승희와 그의 남편이자 매니저였던 안막은 망명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외동딸 안승자가 할머니의 보호 아래 도쿄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회공연 여행을 위해 안승자의 여권도 신청됐지만, 일제 외무성은 최승희와 안막의 여권만 발급했고, 안승자의 여권 신청은 기각했다. 안승자는 인질로 도쿄에 남겨진 것이다.
한편 최승희와 안막은 일제의 문화사절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할 수는 있었지만, 어떤 경우에도 일제의 호전성을 미화하거나 일제의 조선강점을 정당화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민족정체성에 배치될 뿐 아니라, 동족을 배신하는 반민족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승희와 안막은 세계 순회공연의 전 기간을 통해 배일행위도 할 수 없고 반민족행위도 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상황을 이어갔고, 결국 양쪽 경계를 넘지 않으면서 목표를 달성했다. 최승희의 공연은 조선무용을 세계에 알렸고, 최승희 자신도 세계 정상급 무용가로 인정받았다.
최승희와 안막의 시도가 항상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1938년 미주공연은 실패였다. 미국인들의 반일감정이 격화되어 있었고, 일제불매운동이 거세어 최승희의 무용공연도 보이콧 당했다.
재미동포들은 최승희에게 “나는 일본인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면 공연 보이콧을 피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최승희는 “나는 조선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일본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미주순회공연은 4회의 공연 끝에 계약이 취소됐다.
1939년 유럽 순회공연은 성공이었다. 유럽 도착 초기 현지 언론은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소개하기도 했지만, 조선무용 공연이 성공을 거두면서 점차 “조선인 무용가”로 불렀다. 이 경향은 매우 뚜렷해서 일본 공관도 이를 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 공연 초기에 최승희가 “일본인 무용가”로 불렸던 것은 파리 주재 일본 대사관의 리셉션때문이었다. 일본 대사는 파리의 무용가와 평론가, 언론인을 초대해 최승희 리셉션을 열어 주었는데, 리셉션 직후 파리의 언론은 최승희를 일제히 “일본인 무용가”라고 불렀다.
그러나 흥행사 <국제예술기구>는 최승희가 “조선무용을 하는 조선인 무용가”라는 사실을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홍보했다. 1939년 1월31일 <살 플레옐> 공연 이후에는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라고 부르는 언론은 거의 없게 되었다. 이러한 홍보 전략은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도 계속됐고 그 효과는 지속적으로 입증되었다.
일본 공관도 최승희가 “조선인 무용가”로 홍보되는 것을 막지 않았는데, 이는 유럽의 분위기가 미국과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에서는 반일감정이 그리 높지 않아 긴장감이 적었고, 게다가 유럽에서는 민족과 국가가 서로 다른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4개 민족, 벨기에도 3개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였다.
유럽인들은 조선민족이 일본 제국을 구성하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았고, 일본 공관도 그 정도의 인식이라면 최승희가 “조선인 무용가”로 홍보되는 것을 제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2023/3/4,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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