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만세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최승희는 숙명여자보통학교(=초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8세의 최승희가 만세 운동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렇지만 당시의 상황을 목격했을 것이고, 형제와 선배들로부터 만세 운동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당시 최승희는 매일 광화문 대로를 건너 다녔다. 집이 수창동, 학교가 수송동이었기 때문이다. 등하교 길에 최승희는 경복궁이 헐리고 총독부 건물이 세워지는 것을 목격했고,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진급한 기미년 3-5월에는 석 달 동안 계속된 만세운동의 격렬함과 일제 경찰과 헌병의 가혹한 탄압을 목격했을 것이다.
최승희의 남편 안막도 만세운동 당시 9세로 안성보통학교 2학년 학생이었을 것이므로 그 역시 만세운동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역시 가족과 선배들로부터 만세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예컨대 숙명여고보를 다닌 최승희에게는 큰오빠 최승일의 영향이 절대적이었고, 경성제2고보(경복고의 전신)에서 수학한 안막도 박영희(朴英熙, 1901-1950)의 지도를 받았는데, 최승일과 박영희는 배재고보 동창이었고, 만세운동으로 투옥되다가 석방된 후 배재고보를 중퇴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최승희의 <나의 자서전(1936, 1937)>에는 만세운동에 관한 서술이 없다. 최승희를 인터뷰한 신문과 잡지들은 물론, 후일의 평전들도 최승희의 만세운동 경험이나 그에 대한 의견을 언급한 것이 없다. 자서전이나 인터뷰에서 만세운동에 대한 소감을 피력하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만세운동을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라고 평가했던 이완용과 예종석, 윤치호 등은 공개적으로 반대의사를 거듭 표명했고, 일제 당국과 언론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과 달리 의견을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은 만세운동에 동조하는 민족감정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겠다.
실제로 최승희는 십대부터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1927년 2월8일, 도쿄 유학 중이던 최승희는 다이쇼 천황 장례행렬에 절하기를 거부했다. 이시이 바쿠는 자신의 저서 <춤추는 바보(おどるばか, 1955:119)>에서 “(천황의) 관이 지나는 때가 되어 일동이 묵념을 하자 최승희는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고 서술했고, “이유를 묻자 자기는 일본 천황에게 절할 마음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고 덧붙였다.
16세에 이정도의 민족감정을 갖고 있었던 최승희는 1939년 유럽 순회공연 중에도 자신이 ‘조선인 무용가’임을 거듭 밝혔다. 유럽 순회공연 초기 현지 언론은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danseuse japonaise)’ 혹은 ‘극동의 무용가(danseuse de l'Extrême-Orient)’로 소개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최승희의 호칭은 ‘조선인 무용가(danseuse coréenne)’로 바뀌었다.
최승희가 칸과 마르세유 공연을 위해 남프랑스에 왔을 때도 현지 언론은 그를 ‘조선인 무용가’나 ‘극동의 무용가’라고 소개했고, ‘일본인 무용가’라고 호칭한 기사는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심지어 <르 쁘띠 마르세예>와 <르 쁘띠 프로방살>은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를 ‘일본인 무용가’라고 밝히면서도 최승희는 이와 구별하여 ‘극동의 무용가’라고 보도했다.
그보다 1년전 최승희와 안막이 미주 공연을 위해 샌프란시스코 항으로 도착했을 때에도 두 사람은 입국신고서에 자신들이 ‘조선인’임을 밝혔다. 심지어 여객선측이 마련한 승객명단에 자신들의 인종(race)이 ‘일본인(Japanese)’으로 기록된 것을 보고 이를 가로줄로 지우고 ‘조선인(Korean)’이라고 고쳐 쓴 명단이 발견되기도 했다.
최승희와 안막이 가졌던 민족정체성으로 보아 이들이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기미년의 첫 번째 삼일절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매년 삼일절이 돌아올 때마다, 자신들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발표할 수는 없었겠지만, 기미만세운동의 의미와 목표를 되새겼을 것이고, 가까운 조선인들과 함께 그같은 의견을 공유했음에 틀림없다.
1939년의 삼일절 마르세유 공연도 그런 민족정체성에서 기획되었을 것이다. (2023/3/3,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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