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90) 썸네일형 리스트형 [최승희 사진] 1. 도일 즉시 여기 최승희 선생의 무용 유학 초기의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이 사진은 (1) 다카시마 유사부로(高嶋雄三郞)와 정병호 편집의 사진집 와 (2) 정병호의 평전 , (3) 김찬정의 평전 와 (4) 정수웅의 사진집 에도 실려 있습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사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이 ‘언제, 어디서’ 촬영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또 이 사진이 ‘왜’ 촬영됐는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각 문헌마다 설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은 “1926년 (최승희가) 일본으로 건너가기 한 달 전”에 찍은 사진이라고 했습니다. 최승희는 1926년 3월25일 경성을 출발해 4월1일에 도쿄에 도착했으니, (1)의 설명대로라면 이 사진은 1926년 2월말이나 3월초에 경성에서 촬영된 사진이겠.. 연해주 <고려인 민족학교>를 후원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조정희(4회)입니다. 저는 2017년부터 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공연을 조사연구하는 한편, 2020년부터 이라는 모임을 통해 재일 조선학교 무용부를 후원해 왔고, 프로그램이 확장되어서 작년 8월부터는 연해주 고려인 학교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연해주의 가 위기에 처한 것을 알게 되어 도움을 부탁드리려고 이 글을 드립니다. 최재형(崔在亨, 1860-1920) 선생님은 연해주의 덕망 있으신 독립운동가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지원했고, 안중근 선생 사후 그 가족을 돌보신 분입니다. 1919년 만세운동 직후 결성된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으로 선임되었으나, 1920년 연해주에 진주한 일본군 헌병대에 의해 간첩(=독립운동가) 혐의로 체포, 사살되셨습니다. 는 이분의 이름을 딴 연해주 우수리.. [칼의 노래] 4. 이순신의 ‘자연사’ 임진왜란은, 일본 열도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에게 충성하는 맹주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는 주장이라고 본다. 봉건시대의 백성은 땅에 묶여있었다. 백성의 농사 소출에서 세금을 거두는 것이 곧 지배자들의 소득이었다. 일본 열도의 소출로 나누어줄 세금이 마르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해 거기서 거둘 세금을 지방 군주들에게 약속한 것이다. 조선 왕도 마찬가지였다. 공자니 맹자니, 유교니 불교니 떠들었지만, 조선 왕조가 탐했던 것은 백성의 세금이었을 뿐이다. 그 세금을 왜가 빼앗으려 하자 외세를 끌어들여서라도 그 세금을 지키고자 했다. 조선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출병한 명나라 군대는 조선을 지켜봐야 딱히 자기들에게 떨어질 세금이 새로 생기는.. [칼의 노래] 3. 펼치는 페이지마다 ‘죽음’ 죽음은 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임진왜란이 많은 조선인의 죽음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병사들의 전사와 민간인 학살에서부터 한산의 병영과 칠천량 함대의 붕괴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방식과 유형은 다양하고 광범위했다. 를 다시 읽으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조선 백성이 엄청 죽었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죽었는지 밝힌 정부 통계나 학계의 조사연구 결과도 없었다. 그러나 에는 숱한 죽음들이 서술되어 있었고 그 대부분은 의 인용이었다. 실제로 에 인용된 백성들이 죽어가는 모습은 간략하고도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그 서술의 내용을 상상해 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다. 다음은 13쪽부터 시작되는 본문의 첫 세 장(30쪽까지)에 서술된 죽음의 기록이다. [14-15쪽, 인육 썩는 고린내; 16쪽, .. [마르세유 공연] 12. 일출과 몽골과 티롤 1930년대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은 “일본 국가의 조선 민족”으로 요약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일률적이지는 않았다. 최승희가 유럽에 체재하는 동안 보도된 프랑스어 신문들의 서술을 보면 크게 세 가지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조선을 일본과 동일시하는 시각이었다. 1939년 2월6일자 에는 네덜란드 무용가 다르자 콜라인(Darja Collijn)과 최승희를 비교하는 평론이 실렸다. 평자는 다르자 콜라인을 ‘운하와 풍차의 나라에서 온 무용 선교사’로, 최승희를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에서 온 무당(=제사장)’으로 소개했다. “운하와 풍차의 나라”가 네덜란드를 가리켰던 것은 분명하지만,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는 조선이 아니라 일본을 가리킨다. 당시 유럽에서는 조선을 “.. [마르세유 공연] 11. 일본 제국과 조선 민족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은 최승희와 일제당국의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기획되었다. 일제 당국은 악화되는 미주와 서유럽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최승희를 문화사절로 활용하고자 했고, 최승희는 조선무용을 세계에 알리고 자신도 정상급 무용가로 자리 잡고 싶었다. 따라서 최승희와 일제 당국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도움을 주고받아야 했다. 최승희는 일본 여권으로 여행하면서 일본의 문화사절로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일제 당국은 최승희의 공연을 지원하면서 그가 조선인 무용가로 홍보되는 것을 용인해야 했다. 그런데 이러한 타협과 양보에도 넘지 못할 선이 있었다. 최승희는 일본 제국을 비난할 수 없었고, 일제는 최승희 공연의 내용, 즉 조선무용에 대해 간섭할 수 없었다. 일제가 공연 내용에 간섭한다면 최승희는 세.. [마르세유 공연] 10. <반도의 무희>의 삼일절 개봉 ‘반도의 무희(半島の舞姬)’는 일본 언론이 붙여준 최승희의 별명이었다.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일본인들은 일본열도를 ‘내지(內地),’ 조선을 ‘반도’라고 불렀다. 따라서 ‘반도의 무희’라는 별명은 ‘조선의 무용가’라는 뜻이었다. ‘내지’에 대한 상대어로서 ‘반도’는 때로 하대와 경멸의 뜻을 갖기도 했지만 최승희의 경우는 그런 비칭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최승희 자신도 ‘반도의 무희’라는 별명을 불쾌하게 여기거나 회피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였다. 최승희가 첫 번째 미주순회공연에 나섰던 1938년 그의 공연 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엔젤레스에서의 공연이 미국내 극렬한 반일 분위기 속에서 보이콧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공연 보이콧은 뉴욕에서도 계속되었고, 결국 .. [마르세유 공연] 9. 최승희와 안막의 삼일절 기미년 만세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최승희는 숙명여자보통학교(=초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8세의 최승희가 만세 운동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렇지만 당시의 상황을 목격했을 것이고, 형제와 선배들로부터 만세 운동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당시 최승희는 매일 광화문 대로를 건너 다녔다. 집이 수창동, 학교가 수송동이었기 때문이다. 등하교 길에 최승희는 경복궁이 헐리고 총독부 건물이 세워지는 것을 목격했고,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진급한 기미년 3-5월에는 석 달 동안 계속된 만세운동의 격렬함과 일제 경찰과 헌병의 가혹한 탄압을 목격했을 것이다. 최승희의 남편 안막도 만세운동 당시 9세로 안성보통학교 2학년 학생이었을 것이므로 그 역시 만세운동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역시 가족과 선.. 이전 1 ··· 49 50 51 52 53 54 55 ··· 6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