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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오해들] <나의 자서전>이 풀어준... (2) 몰락 2. 경제적 몰락의 이유 모든 평전과 연구서들은 최승희가 여학교 1학년 시절에 아버지 최준현이 경제적으로 몰락했다고 서술했고,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그 원인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다면 이러한 서술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첫째, 시기의 문제이다.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은 1910년에 시작되어 1918년에 끝났다. 최승희 집안이 여학교 1학년 때 몰락했다면 그것은 1922년 4월부터 1923년 3월 사이의 일이다. 즉, 토지조사사업 자체가 최승희 집안의 경제적 몰락의 직접 원인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특히 최승희가 태어난 경성부 서부 지역의 토지조사사업은 1913년에 끝났고, 부친 최준현의 토지가 있던 강원도 홍천지역의 토지조사사업은 1916년에 ..
[6개의 오해들] <나의 자서전>이 풀어준... (1) 서울 출생 1. 최승희는 서울 태생 대부분의 평전들은 일관되게 최승희의 출생지는 경성, 즉 서울이라고 서술했다. 그러나 그녀가 홍천 태생이라는 설도 있다. 한국에서 최승희의 고향이 강원도 홍천이라는 주장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89년이었고, 2006년에는 의 함광복 기자가 “우린 왜 '최승희의 홍천'을 찾아야 하는가”라는 장문의 글을 통해 최승희의 출생지는 “강원도 홍천군 남면 제곡리 237번지 혹은 244번지”라고 주장했다. 2006년이면 최승희 탄생 1백주년(2011년)을 앞두고 남,북한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 각종 추모행사가 기획되면서 최승희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최승희의 홍천 출생설은 ‘새로운 발견’으로 ‘화젯거리’가 되었고 들불처럼 번졌다. 오늘날 대부분의 최승희 연구서들이 ‘홍천 출생..
[6개의 오해들] <나의 자서전>이 풀어준... (0) 서론 최승희의 이 풀어준 6개의 오해 조정희 (최승희 연구가), 2021년 2월18일, 의 개막을 축하하며..., 0. 서론 나의 최승희 조사연구가 4년째다. 최승희의 삶과 춤에 대한 적지 않은 이해를 갖게 됐지만, 여전히 의문으로 남은 문제도 많다. 자료 부족은 손쉬운 핑계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세계 곳곳에 산재한 최승희 관련 자료를 찾아내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문헌 사이에도 불일치가 적지 않다. 최승희 평전과 연구서, 신문과 잡지의 기사들 사이에 엇갈리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인터넷 포스팅은 말할 것도 없다. 또 기존 문헌들 사이에 일치된 사안이라도 과연 그것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의심할 내용도 있다. 최근 최승희의 을 다시 읽으면서 이 책이 그 같은 불일치..
<무용신>이 제24회 <강릉인권영화제>를 후원합니다 가 9월9-10일 강릉시 월화거리에서 열립니다. 이번 강릉인권영화제의 주제는 “노동자의 인권”입니다. 과 자매단체들은 제24회 강릉인권영화제를 후원합니다. 저희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효고현 다카라즈카에서 조선인 노동자 5분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음을 알았고, 이들을 108년 동안 위령 제사하고, 2020년 이들을 위한 추도비를 세우신 분들이 계심을 알게 됐습니다. 저희는 희생자의 한 분인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릉이었음을 밝힌 후, 강릉시가 추도비 건립자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해 줄 것을 청원했습니다. 이 청원은 받아들여져서 2022년 4월 강릉시장 명의의 감사패가 6명의 일본인과 2명의 재일동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후 한국동포들과 재일동포들의 추도비 참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과정이 재일동포 사진가 ..
[남미취재] 0. 준비의 시작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崔承喜の写真] 2.世紀のスクープ 淑明女学校の卒業式直後の崔承喜(チェ·スンヒ)の写真がもう一枚あります。 1926年3月25日の『京城日報(3面)』に掲載された写真です。 その後、世界各国で数百のメディアが数千枚あるいは数万枚の崔承喜の写真を報道したでしょうが、のこの写真がメディアで報道された最初の崔承喜写真です。 世紀のスクープ写真だったわけです。 しかし、このスクープ写真の画質が良くありません。 まるで急いで現像して光が入ったせいで曇ったように見えます。 1920年代の新聞社の写真記者なら撮影だけでなく、現像とプリントに印刷用製版まで担当した専門家です。 それでも写真がこんなに粗末に現象していたら、きっと何か事情があったはずです。 写真が載った記事がインタビュー記事なので、この写真はインタビューの途中か前後に撮影した写真でしょう。 ところが、このようにぼやけた写真をそのまま掲載しました。 代替する他の写真がなかっ..
[최승희 사진] 2. 세기의 특종 숙명여학교 졸업식 직후의 최승희 사진이 한 장 더 있습니다. 1926년 3월25일 에 실린 사진입니다. 이후 세계 각국에서 수백 개의 매체가 수천 장 혹은 수만 장의 최승희 사진을 보도했겠지만, 의 이 사진이 언론 매체에 보도된 최초의 최승희 사진입니다. 세기의 특종 사진이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이 특종 사진의 화질이 좋지 않습니다. 마치 급히 현상하다가 빛이 들어가는 바람에 흐려진 것처럼 보입니다. 1920년대의 신문사 사진기자라면 촬영뿐 아니라 현상과 인화에 인쇄용 제판까지 담당했던 전문가입니다. 그런데도 사진이 이렇게 허술하게 현상되었다면 필시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진이 실린 기사가 인터뷰 기사이므로 이 사진은 인터뷰 도중이나 전후에 촬영한 사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흐려진 사진을 ..
[崔承喜の写真] 1.渡日即時 ここに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の舞踊留学初期の写真が一枚あります。 この写真は(1)高島雄三郎と鄭昞浩(チョン·ビョンホ)編集の写真集と(2)鄭昞浩の評伝、(3)金贊汀(キム·チャンジョン)の評伝と(4)鄭秀雄(チョン·スウン)の写真集にも載っています。 すでに広く知られている写真という意味です。 しかし、この写真が「いつ、どこで」撮影されたのか明確ではありません。 また、この写真が「なぜ」撮影されたのか、「どのように」使われたのかも定かではありません。 各文献ごとに説明が異なるからです。 (1)は"1926年(崔承喜が)日本に渡る一ヶ月前"に撮った写真だそうです。 崔承喜は1926年3月25日京城を出発して4月1日に東京に到着しましたので、(1)の説明によると、この写真は1926年2月末か3月初めに京城で撮影された写真です。 (2)は「崔承喜が東京に発つ前」に撮った「16歳の時」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