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

(552)
[다카라즈카1935공연] 16. 다카라즈카극장 어트랙션 최승희가 1935년 11월9일 레뷔 공연단인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의 대극장 공연을 단행한 것은 공연수익과 홍보효과의 극대화를 겨냥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다카라즈카는 일본 인구가 7천만명이던 시절에도 연간 1천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최대 관광지였고, 따라서 다카라즈카 대극장 공연은 일본 전역을 상대로 공연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최승희의 다카라즈카 대극장 공연과 야외무용 촬영대회를 후일 다시 시도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1936년 이후 최승희는 이미 일본 최고의 예술가로 자리를 잡았고, 예술무용 공연만으로도 충분한 수입과 홍보효과를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최승희는 이후 레뷰와의 교류를 중단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1935년 11월9-10일의 다카라즈카..
[宝塚1935公演] 15. 宝塚の野外舞踊 崔承喜が師匠である石井漠の娯楽舞踊に対する認識と態度を大部分受け入れたが、レビューに対してだけは師匠と違って開かれた態度を堅持したという点は、彼女がよく野外舞踊を試みたことからも確認できる。 石井漠も劇場を離れて野外舞踊を試みたことはあった。 石井漠舞踊団は1926年7月に東京日比谷野外音楽堂で公演を行ったことがあり、北海道巡回公演の途中だった同年8月には札幌の中島公園の野外舞台で公演したことがある。 しかし、石井漠の野外舞踊は、劇場での舞踊公演を野外舞台に移したという点で、あまり大きな違いはなかった。  しかし、崔承喜の野外舞踊は舞踊公演というよりは野外舞踊写真撮影会で行われたりもした。 すなわち、崔承喜が野外であらかじめ選曲した作品を上演する間、有料入場したアマチュアおよびプロ写真家たちがチェ·スンヒの舞踊動作を自由に写真を撮ることだった。 最初の崔承喜野外舞踊撮影会は1934年8..
[다카라즈카1935공연] 15. 다카라즈카의 야외무용 최승희가 스승 이시이 바쿠의 오락무용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대부분 받아들였지만, 레뷰에 대해서만은 스승과 달리 열린 태도를 견지했다는 점은, 그녀가 자주 야외무용을 시도했던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시이 바쿠도 극장을 벗어나 야외무용을 시도한 적은 있었다. 이시이 무용단은 1926년 7월에 히비야 야외음악당에서 공연을 진행한 바 있고, 홋카이도 순회공연 도중이었던 그해 8월에는 삿포로의 나카지마공원의 야외무대에서 공연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시이 바쿠의 야외무용은 극장에서의 무용공연을 야외무대로 옮겼다는 점에서 그다지 큰 차이점이 없었다.  그러나 최승희의 야외무용은 무용공연이라기보다는 야외무용 사진촬영회로 진행되곤 했다. 즉 최승희가 야외에서 미리 선곡한 작품을 상연하는 동안 유료 입장한 아마..
[은하수2025보성] 1. 은하수의 보성 엠티 요즘도 엠티(MT)라는 말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40년전 대학에서 쓰던 ‘써클’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백기완 선생님이 보급하신 ‘동아리’라는 말이 그 자리를 대신했더군요. 백기완 선생님은 ‘엠티’ 대신에도 ‘모꼬지’를 제안하셨다는데 아직 널리 쓰이지는 않나 봅니다. ‘모꼬지’는 16세기 문헌에 나올 만큼 연원이 오래고, 지금 국어사전에도 “놀이나 잔치, 그 밖의 일로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이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엠티의 뜻과 얼추 비슷한 것 같지만, 엄밀히 말하면 모꼬지는 그냥 ‘모임’이라는 말입니다. 엠티라는 말을 대신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인 거죠.  우리가 아는 ‘엠티’는 “모임의 구성원들이 유대감이나 친밀도를 높이려고 합숙을 포함해서 가는 여행”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런 뜻으로 써왔..
[宝塚1935公演] 14. 崔承喜の危機対応 1933年3月に再び東京に渡った崔承喜は、石井舞踊団に復帰、師匠の石井漠が主導する各種舞踊講習会で舞踊助手として働きながら、その給料を生活費にして研究と公演参加を続けた。 1934年9月に第1回東京舞踊発表会を開き、1935年4月に独立して「崔承喜舞踊研究所」を設立し、独自の舞踊活動を始めた。 この時、崔承喜も他の新進舞踊家たちが直面した芸術舞踊の危機に同じように露出せざるを得なかった。 彼女はどのようにしてこの危機を打開し、新進舞踊家の先頭走者として認められながら、生活を維持し、芸術舞踊活動を続けることができたのだろうか?  第一に、崔承喜は手当たり次第に舞踊公演を行った。 彼女の舞踊公演の出演日誌を見ると、1935年5月5日から8月20日まで約4ヵ月も経たないうちに、東京だけで31回の公演を行った。 名古屋(6月9日)と横須賀(7月26日)の遠征公演まで合わせると、75日間で33回..
[다카라즈카1935공연] 14. 최승희의 위기대응 1933년 3월에 다시 도쿄로 건너간 최승희는 이시이 무용단에 복귀, 스승 이시이 바쿠가 주도하는 각종 무용강습회에서 무용조교로 일하면서 그 급료를 생활비로 삼아 연구와 공연 참여를 계속했다. 1934년 9월에 제1회 도쿄무용발표회를 가졌고, 1935년 4월에 독립해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독자적인 무용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최승희도 신진무용가들이 직면했던 예술무용의 위기에 똑같이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이 위기를 타개하고 신진무용가의 선두주자로 인정받으면서, 생활을 유지하고 예술무용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일까?  첫째, 최승희는 닥치는 대로 무용공연을 진행했다. 그녀의 무용공연 출연일지를 보면 1935년 5월5일부터 8월20일까지 약 4개월도 안 되는 동안 도쿄에서만 31회..
[宝塚1935公演] 13. 芸術舞踊界の対応 1910年代後半に胎動した日本の新舞踊は1920-30年代に入って社交ダンスとレビュ、そして映画によってその存在基盤である観客層が脅かされた。 これに対して芸術舞踊界はどのように反応したのだろうか? 1910年代に新舞踊を始めた第1世代の舞踊家たちは、娯楽舞踊と映画の挑戦を深刻に思っていなかったようだ。 それもそのはず、1910年代後半と1920年代半ばまでは新舞踊と呼ばれた西洋式芸術舞踊は新しい文物であり、観客の反応が肯定的だったためだ。  類型が少しずつ異なる日本の第1世代舞踊家としては、石井漠(1886~1962)、高田雅夫(1895~1929)と高田せい子(1895~1977)夫妻、そしてロシア系日本人ののエリアナ·パヴロワ(Еле́на Па́влова、1897~1941)がいる。 石井漠は社交ダンスには関心がなかったが、東京歌劇座と東京オペラ座の時期にはレヴューに近い公演..
[다카라즈카1935공연] 13. 예술무용계의 대응 1910년대 후반에 태동한 일본의 신무용은 1920-30년대 들어 사교댄스와 레뷰, 그리고 영화에 의해 그 존재기반인 관객층이 위협을 받았다. 이에 대해 예술무용계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1910년대에 신무용을 시작한 1세대 무용가들은 오락무용과 영화의 도전을 심각하지 않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1910년대 후반과 192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신무용이라고 불리던 서양식 예술무용은 새로운 문물이었고 관객들의 반응이 긍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유형이 조금씩 다른 일본의 1세대 무용가로는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6-1962), 다카다 마사오(高田雅夫, 1895-1929)와 다카다 세이코(高田せい子, 1895-1977) 부부, 그리고 엘리아나 파블로바(Еле́на Па́влова, 18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