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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1934公演】 34. [The Japan Advertiser]の誤報 1930年代、日本では「The Japan Advertiser」という英語新聞が発行されていた。 1890年に米国人ロバート·メクレゾン(Robert Meiclejohn)によって横浜で創刊されたが、1913年に本社を東京に移して発行され、1940年に日本帝国の言論統廃合で「The Japan Times」に吸収された新聞だ。 合併後の新聞名は「The Japan Times and Advertizer」と改称されたが、1943年に「Nippon Times」と改名され、1956年に再び「The Japan Times」の元の名前に戻った。 1935年2月10日付「The Japan Advertiser」は崔承喜の紹介記事を掲載した。 崔承喜の東京デビュー公演以後、約4ヶ月が過ぎた時点だが、彼女の名声が急速に高まると特別取材とインタビューを並行して作成した記事を出したのだ。 し..
[도쿄1934공연] 34. [The Japan Advertiser]의 오보 1930년대 일본에서는 [The Japan Advertiser]라는 영어신문이 발행되고 있었다. 1890년에 미국인 로버트 메이클레존(Robert Meiclejohn)에 의해 요코하마에서 창간되었으나 1913년 본사를 도쿄로 옮겨 발행되다가, 1940년 일제의 언론 통폐합으로 [The Japan Times]에 흡수된 신문이다. 합병 후의 신문 이름은 [The Japan Times and Advertizer]로 개칭됐으나, 1943년에 [Nippon Times]로 개명되었다가 1956년에 다시 [The Japan Times]의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 1935년 2월10일자 [The Japan Advertiser]는 최승희 소개 기사를 게재했다. 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 이후 약 4개월이 지난 시점이지만, ..
[東京1934公演] 33.公演評価(5) [三千里]の具王三 崔承喜の東京デビュー公演直後、石井舞踊団は朝鮮巡業に発った。 京城では1934年10月28-29日の2日間公演を開いたが、崔承喜の振付作品は計5つの演目で、28日の公演では「習作」、「エヘヤ·ノアラ」、「剣の舞」、29日には「希望を抱いて」と「僧の舞」が上演された。  写真作家の具旺三(ク·ワンサム、1909-1977)は両方の公演を観覧し、自身の感想を「三千里」1935年1月号に寄稿した。 彼は文章の冒頭で朝鮮の舞踊状況について次のように叙述した。 「特に舞踊分野は、歴史的遺産が極めて貧弱で、生活と有機的に結びつかないまま、舞踊に対する因習的ニ奇怪な悪観念によって、朝鮮の舞踊は長い間受難期にあって…··· まだ朝鮮は民俗舞踊や古典舞踊が共に荒廃した広野が横たわっているだけだ」 文章がそれほどきれいではないが、朝鮮の舞踊に対する具王三の認識が崔承喜のそれと同じであることがわかる。 具王..
[도쿄1934공연] 33. 공연평(5) [삼천리]의 구왕삼 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 직후, 이시이무용단은 조선 순회공연을 떠났다. 경성에서는 1934년 10월28-29일 이틀 동안 공연을 열었는데, 최승희의 안무작품은 모두 5개 연목으로, 28일의 공연에서는 [습작], [에헤야 노아라], [검무], 29일에는 [희망을 안고서]와 [승무]가 상연되었다.  사진작가 구왕삼(具王三, 1909-1977)은 두 공연을 모두 관람하고 자신의 감상을 [삼천리] 1935년 1월호에 기고했다. 그는 글의 첫머리에서 조선의 무용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유독 무용분야는, 역사적 유산이 극히 빈약하고, 생활과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못한 채, 무용에 대한 인습적 기괴한 악관념으로 인하야, 조선의 무용은 오랫동안 수난기를 당하야 ... 아직 조선은 민속무용이나 고전무용이 다 같..
【東京1934公演】 32.公演評(4) 「文芸」の川端康成 崔承喜の東京デビュー公演は新聞や雑誌によって積極的に取材されたり報道されたりしなかったものと見られる。 公演前には広報記事と広告文が少なからず掲載され、チェ·スンヒ自身も「公演に際して」ある感想を明らかにした寄稿文が発見されるが、実際に公演直後にはこれを評価した記事はあまりなかった。 だが、公演が終わった後、一ヶ月後「文芸」誌1934年11月号に川端康成(1899-1972)の公演感想文、「朝鮮舞姬崔承喜」が載せられたが、この文の爆発力が非常に大きかった。 公演感想文というよりは、崔承喜と彼の朝鮮舞踊に対する紹介と推薦の文だが、この文の最初の部分は次の通りである。  「「日本一座談會」といふものを、「モダン日本」が今年の正月號に催した時、女流新進舞踊家中の日本一は誰かと聞かれ、洋舞踊では崔承喜であらうと、私は答へておいた。··· 私はなんの躊躇もなく、崔承喜が日本一であると答へたのだつ..
[도쿄1934공연] 32. 공연평(4) [문예]의 카와바타 야스나리 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은 신문이나 잡지에 의해 적극적으로 취재되거나 보도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연 전에는 홍보기사와 광고문이 적지 않게 게재되었고, 최승희 자신도 “공연에 즈음”한 감상을 밝힌 기고문이 발견되지만, 정작 공연 직후에는 이를 평가한 기사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 후 한 달후 [문예(文藝)]지 1934년 11월호에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의 공연 감상문, “조선무희 최승희”가 실렸는데, 이 글의 폭발력이 매우 컸다. 공연감상문이라기 보다는 최승희와 그의 조선무용에 대한 소개와 추천의 글인데, 이 글의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일본일 좌담회(日本一座談會)’라는 것을 [모던일본(モダン日本)]이 개최했을 때, 여류 신진 무용가 중에 일본 제일은 누구냐..
【東京1934公演】 31.公演評(3) 「アサヒグラフ」と「横浜グラフ」 崔承喜の東京デビュー公演直後、新聞と雑誌がこの公演をあまり記事にしなかったのは意外だ。 「朝日新聞」や「日日新聞(=後日の毎日新聞)」は全く報道しておらず、日刊新聞では「時事新報」の記事が唯一だ。 これは当時の朝鮮でも同じだった。 [東亜日報]と[朝鮮日報]はもちろん、「毎日新報」などの韓国語新聞も東京公演前にはたまに紹介記事を報道したが、公演が終わった後にはただの一件の記事も出さなかった。  1934年9月22日付[朝鮮中央日報(呂運亨)]が唯一崔承喜の東京公演記事を掲載したが、これは前日報道された[京城日報]の記事を翻訳して転載したものと見られる。 (このような慣行を別名「ウラカイ(裏返)」という。) これは「朝鮮新聞」や「釜山日報」などの朝鮮で発行されていた他の日本語新聞も同様だった。 後日、この公演が崔承喜の未来だけでなく、日本舞踊界と朝鮮舞踊界に及ぼした大きな影響を考えれば、..
[도쿄1934공연] 31. 공연평(3) [아사히그라프]와 [요코하마그라프] 최승희의 도쿄데뷔공연 직후 신문과 잡지가 이 공연을 그다지 기사화하지 않은 것은 의외이다. [아사히신문]이나 [니치니치신문(=훗날 마이니치신문)]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고, 일간신문으로는 [지지(時事)신보]의 기사가 유일하다. 이는 당시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물론 [매일신보] 등의 한국어 신문들도 도쿄공연 전에는 더러 소개기사를 보도했지만, 공연이 끝난 뒤에는 단 한 건의 기사도 내지 않았다.  1934년 9월22일자 [조선중앙일보(여운형)]가 유일하게 최승희의 도쿄공연 기사를 게재했지만, 이는 전날 보도된 [경성일보]의 기사를 번역해 전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행을 일명 ‘우라카이’라고 한다.) 이는 [조선신문]과 [부산일보] 등의 조선에서 발행되던 다른 일본어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