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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순회공연] 1. 중남미 첫 공연: 푸에르토리코 대학 공연 평전들은 최승희의 중남미 공연이 1940년 5월27일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시작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정병호(1995:174쪽)는 리우데자네이로의 뮈니시팔 극장 공연이 남미 공연의 첫 공연이었다고 서술했고, 다카시마 유사부로(1981[1959]:89쪽)와 김찬정(2002: 232쪽)과 강준식(2012:249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최승희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공연 한 달 전에 푸에르토리코 공연을 단행한 바 있다. 1940년 4월22일, 푸에르토리코 국립대학교의 대학극장(Teatro Universitario)에서였다. 최승희의 푸에르토리코 공연은 여러 신문이 보도했다. 우선 1940년 3월13일자 푸에르토리코 대학교의 대학신문 는 푸에르토리코 대학교의 돈 호세 게이츠(Don José Guei..
[中南米巡回公演] 0.崔承喜の中南米公演の取材 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の「世界」巡回公演は3段階で取材された。 第一は「ヨーロッパ」取材で2017年5月から40日間行われた。 厚岩(フアム)文化財団の故車吉辰(チャ·ギルジン)会長の財政支援に支えられ、欧州7カ国15都市を訪問し、崔承喜の公演資料を収集し、同年末までに原稿用紙4千枚の取材記を書いた。 第2は「米国」取材だった。 崔承喜の米国公演取材は、欧州取材記の執筆中に始まった。 米国公演は欧州公演直前と直後にあったため、その関連性を調査する必要があったからだ。 特に、欧州公演レパートリーをきちんと整理するためには、1938年初めの米国公演レパートリーと1939年末と1940年初めの米国巡回公演レパートリーも調査して比較する必要があった。 第3が「中南米」巡回公演調査だが、この地域の崔承喜公演はほとんど調査されなかった。 地理的に遠く、言語の壁も侮れなかったからだ。 これまで発..
[중남미 순회공연] 0. 최승희 중남미 공연 취재 최승희 선생의 ‘세계’ 순회공연은 3단계로 취재됐다. 첫째는 ‘유럽’ 취재로 2017년 5월부터 40일 동안 진행됐다. 후암문화재단의 고 차길진 회장의 재정 지원에 힘입어 유럽 7개국 15개 도시를 방문, 최승희 공연 자료를 수집했고, 그해 말까지 원고지 4천매의 취재기를 썼다. 두 번째는 ‘미국’ 취재였다. 최승희의 미국 공연 취재는 유럽 취재기 집필 중에 시작했다. 미국 공연은 유럽 공연 직전과 직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연관성을 조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 공연 레퍼토리를 제대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1938년 초의 미국공연 레퍼토리와 1939년 말과 1940년 초의 미국순회 공연 레퍼토리도 조사해 비교할 필요가 있었다. 세 번째가 '중남미' 순회공연 조사인데, 이 지역의 최승희 공연은 거..
[千田是也] 4. NHK教育放送(ETV)証言 千田是也は東京大震災の翌日の夜の経験を直接証言したこともある。 2016年9月3日、NHK放送の教育放送であるETVの特集「関東大震災と朝鮮人の悲劇はなぜ起きたのか」に出演した千田是也は次のように証言した。 千田是也は1994年に亡くなったので、おそらく彼の生前のインタビューを編集した映像だった。 「私のセンダ・コレヤ(*)という芸名の由来である(千駄ヶ谷をとって“千田” 朝鮮人つまりコーリアンをもじって“是也”というわけである)千駄ヶ谷で朝鮮人に間違えられて殺されそうになった事件の起きたのは、大震災の二日目の晩だったとおぼえている。 「町々の炎が夜空を真っ赤にそめ、ときどきガソリンや火薬の爆発する無気味な音が聞こえ、余震が繰り返され、担架や荷車に乗せた負傷者たちの行列がつづく状況のなかで聞くと、 朝鮮人が日ごろの恨みで大挙して日本人を襲撃しているとか、無政府主義者や社会主義者が井戸に..
[센다 코레야] 4. NHK 교육방송(ETV) 증언 센다 코레야(千田是也)는 도쿄 대지진 다음날 밤의 경험을 직접 증언한 적도 있다. 2016년 9월3일 일본 NHK방송의 교육방송인 ETV의 특집 프로그램 에 출연한 센다 코레야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센다 코레야는 1994년에 사망했으므로, 아마도 그의 생전에 진행된 인터뷰를 편집한 영상이었을 것이다. “나의 예명 ‘센다 코레야’의 유래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한다. 이 예명은 센다가야를 따서 ‘센다’, 그리고 조선인, 즉 코리안을 따라 ‘코레야’라고 지은 이름이다. 내가 센다가야에서 조선인으로 오해받아 살해당할 뻔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대지진 이틀째 되는 날 밤으로 기억한다. “마을마다 불길이 밤하늘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고, 이따금씩 휘발유와 화약이 터지는 섬뜩한 소리가 들리고, 여진이 반복되고, 들..
[千田是也] 3. 芸名で朝鮮人支持 千田是也という芸名·ペンネームの由来について、日本の百科事典は沈黙しているが、2017年9月に『アジアプレス(Asia Press)』ホームページに掲載された加藤直樹(1967-)の記事にはその理由が詳しく記されている。 発端は1923年の関東大震災直後の朝鮮人虐殺事件だった。 これについての記事を記事を転載してみよう。 「当時、彼(=千田是也)は19歳で、東京・千駄ヶ谷に住んでいた。震災の翌日(=9月2日)夜、朝鮮人の集団が日本人を襲っているという流言を信じた彼は、杖を手に街に飛び出したが、 反対に朝鮮人に間違えられ、竹やりやこん棒で武装した男たちにこづきまわされる。たまたま彼を知る者が通りかかったことで解放されたが、危ういところだった。 「だが4日後の9月6日には戒厳司令部が「朝鮮人暴動」の流言を明確に否定し、翌10月下旬には、報道規制の解除によって、関東各地で繰り広げられた朝鮮人..
[센다 코레야] 3. 예명으로 조선인 연대 센다 코레야라는 예명/필명의 유래에 대해서 일본의 백과사전들은 침묵하지만, 2017년 9월 홈페이지에 게재된 카토 나오키(加藤直樹, 1967-)의 기사에 그 이유가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발단은 1923년의 간토대지진 직후의 조선인 학살 사건이었다. 이에 대한 의 기사를 번역해 보자. “당시 그(=센다 코레야)는 19세로 도쿄 센다가야(千田谷)에 살고 있었다. 지진 다음 날(=9월2일) 밤, 조선인 집단이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듣고 이를 사실로 믿은 그는, 몽둥이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그는 거꾸로 조선인으로 오해되어 죽창과 곤봉으로 무장한 남자들에게 붙잡혀 둘러싸였다. 우연히 그를 아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보고 오해를 풀어주어서 풀려났지만, 목숨이 위태로울 뻔했던 것이다. “나흘..
[千田是也] 2. 芸術家の家系 千田是也は名門芸術家の家柄である。「日本大百科全書ニポニカ」は、舞踊家の伊藤道郎(ミチオ、1893-1961)と舞台美術家の伊藤熹朔(キサク、1899-1967)が兄だと紹介したが、父親の伊藤為吉(いとう ためきち、1864-1943)も建築家や発明家であり、彼の他の兄弟たちも画家、オペラ歌手、作曲家などの芸術家として活動した。 なかなかの家柄だ。 父親の伊藤為吉は三重県松阪出身で17歳で東京に上京、工部大学(=東京工科大学の前身)で機械工学を専攻し、22歳で米国に渡りサンフランシスコ近郊の修道会でキリスト教徒となった。 学費を賄うためにクリーニング店で働く一方、イタリア人建築家カペレッティ(Giovanni Vincenzo Cappelletti, 1843-1887)の建築設計事務所で製図工として働きながら建築学と物理学を学んだ。 1887年に帰国した伊藤為吉は、東京で日本初の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