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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1934공연

[도쿄1934공연] 5. 신진 무용가들

최승희는 데뷔 공연을 단행하면서 이시이 에이코의 데뷔 공연에 자극을 받았다고 했지만, 1934년 가을의 도쿄 무용계가 전반적으로 활기를 띄기 시작한 것도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신무용의 붐이 일기 시작했기 때문에 여기에 편승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일본양무사연표>를 보면 1930년대 초반 일본에서 실제로 신무용 붐이 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각 년도의 주요 신무용 공연 수의 추이를 보면 1926년의 9, 19278, 1928년의 4, 1929년의 10, 1930년의 8건으로 1920년대 후반에는 연간 10건 이하로 유지되었으나, 1931년에는 14, 1932년의 20, 1933년과 1934년에는 25건으로 크게 늘었다.

 

 

1930년대의 신무용 붐은 서너 사람의 선구자가 주도한 것인데, 그 중 한사람인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6-1962)<나의 얼굴(1940)>에서 자신을 포함, 다카다 마사오(高田雄夫, 1895-1929)와 다카다 세이코(高田せい, 1895-1977) 부부, 이와무라 카즈오(岩村和雄, 1902-1932), 엘리아나 파블로바(エリアナ・パヴロヴア, 1897-1941)를 선구자로 꼽았다.

 

이 선구자들의 제자들이 1930년대 신무용 붐의 주역들인데, 이시이 바쿠는 각 무용단의 주요 신진무용가들에 대한 짧은 평을 서술했다. 이들의 명단만 보면 다음과 같다.

 

 

다카다高田)무용단의 신진무용가는 사카이 치요코(堺千代子)아라오 시즈카(荒尾静一)카시마 미츠시게(鹿島光滋)마츠다 다카시(益田隆)미야 지요코(宮操子)에구치 타카야(江口隆哉)카시와 사다코(柏貞子)단메레(めれ)야노 후미코(矢野文子)이나바 하츠에(稲葉初枝)나카무라 에미코(中村笑子)하라오카 토난오(平岡斗南夫) 등의 12명으로 가장 많았고,

 

이시이(石井)무용단 출신으로는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아라키 요(荒木陽)이시이 이쿠코(石井郁子)3명은 이미 독립해 활동 중이었고1934년 당시 이시이무용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신진 무용가들로는 이시이 에이코(石井栄子)최승희(崔承喜)이시이 미도리(石井みどり)이시이 미에코(石井美笑子)조택원(趙澤元)칸미즈 다쿠모(寒水多久茂) 등의 6명이 거명되었다.

 

 

한편 러시아 출신으로 일본 무용계에서 활약해 온 엘리아나 파블로바의 무용단에는 후지타 시게루(藤田繁), 시바 레이코(芝麗子), 오키요야마 히코시(興世山彦士), 히가시 유사쿠(東勇作), 후카자와 히데카(深澤秀嘉), 타치바나 아키코(橘秋子)6명이 활동하고 있다고 했고, 그밖에도 이와무라(岩村) 무용단 출신의 시교 마사토시(執行正俊)와 치바 미하루(千葉みはる)를 신진무용가로 꼽았다.

 

 

이렇게 해서 이시이 바쿠가 꼽은 1934년 당시 활동을 시작한 신진 무용가는 모두 29명이었는데, 그밖에도 이시이 바쿠는 10명의 신진 독립 무용가들에 대해서도 주목했었다. 이들은 야마다 코로(山田五郎), 고헤테이(ヘテイ), 뤼트 이나키(ルート・イナキ), 쿠니 마사미(邦正美), 야오야마 케이스오(青山圭男), 시마 요코(島洋子), 신구 히로시(新宮博), 타자와 치요코(田澤千代子), 우메조노 류코(梅園龍子), 카게츠 타츠코(花月達子) 등인데, 이중 쿠니 마사미의 본명은 박영인(朴永仁)으로 최승희, 조택원과 함께 조선 출신이다.

 

 

1920년대 초에 신무용을 시작했던 선구자들은 서너 명에 불과했으나, 19349월경 일본 무용계에 등장해 활동 중인 신진무용가는 4개 무용단의 29명과 독립무용가 10명으로 모두 39명을 헤아렸다. 10년 전에 비하면 거의 10배로 늘어난 것이다. 이들이 193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자, 일본 무용계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시이 바쿠는 신진 무용가의 등장을 환영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경계의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오늘날의 젊은 무용가 중 상당수는 지나치게 공을 서두르는 듯 하다. 무용예술에 대한 진정한 열의에서가 아니라, 부박한 생각이나, 생활의 수단으로 무용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많기 때문인지, 반년이나 1년의 연습으로 바로 발표회를 하고, 연구소를 만들고, 제자를 가르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좋지 않은 경향이다.”

 

 

신무용계에 신진 무용가들이 대거 배출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예술적 열정이 아니라 무용을 명성과 생활의 방편으로 삼으려는 경향을 이시이 바쿠가 경계한 것이다. (jc, 2024/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