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90) 썸네일형 리스트형 [東京1934公演] 6.通過儀礼 石井漠は自伝的エッセイ集「私の顔(1940)」に収録した「新進舞踊家を語る(1934年10月)」という文で、自分が養成した舞踊家9人を列挙し、短い評価を述べている。 まず、女性舞踊家6人に対する石井漠の評価を見てみよう。 石井小浪は石井漠の義妹で、1922年から石井漠とともに3年間海外巡業に同行し、舞踊の実力が急成長した舞踊家だ。 1929年、崔承喜が石井漠門下を離れる頃、彼女も舞踊団を離れた。石井漠は小浪について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 「石井小浪ー五年前に別れて以来會つたことがないが、昨秋永田氏にすゝめられてその公演會をのぞいた。そして舞踊に對する考へも技巧も一向に進歩のあとがないのを見て驚いた。すべての藝術と同じく舞踊も、安住の中から傑れた作品は生れて来ない。自分自身のためは勿論、敎へ子のためにも奮起する気持はないのか。」 家族であり弟子であり同僚だった小浪に対する石井漠の叙述.. [도쿄1934공연] 6. 통과의례 이시이 바쿠는 자전적 에세이집 나의 얼굴(1940)>에 수록한 “신진무용가들을 말한다(新進舞踊家を語る, 1934년10월)”라는 글에서 자신이 양성한 무용가 9명을 열거하고 짧은 평가를 서술한 바 있다. 먼저 여성 무용가 6명에 대한 이시이 바쿠의 평가를 보자.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는 이시이 바쿠의 처제로 1922년부터 이시이 바쿠와 함께 3년간 해외 순회공연에 동행하면서 무용 실력이 급성장한 무용가다. 1929년 최승희가 이시이 문하를 떠날 무렵 그녀도 무용단을 떠났다. 이시이 바쿠는 코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 - 5년 전 헤어진 이래 만난 적이 없지만, 작년 가을 나가타(永田)씨의 추천으로 공연회를 보았다. 무용에 대한 그녀의 생각과 기교에 전혀 진보의 흔적이.. [東京1934公演] 5.新進舞踊家たち 崔承喜はデビュー公演を断行し石井英子のデビュー公演に刺激を受けたと言ったが、1934年秋の東京舞踊界が全般的に活気を帯び始めたことも大きな要因だっただろう。 新舞踊のブームが起こり始めたので、これに便乗する必要があると判断したのだろう。 『日本洋舞史年表』を見ると、1930年代初め、日本で実際に新舞踊ブームが起きたことが分かる。 各年度の主要新舞踊公演数の推移を見ると、1926年の9件、1927年の8件、1928年の4件、1929年の10件、1930年の8件で1920年代後半には年間10件以下に維持されたが、1931年には14件、1932年の20件、1933年と1934年には25件と大きく増えた。 1930年代の新舞踊ブームは3、4人の先駆者が主導したものだが、そのうちの1人である石井漠(1886~1962)は『私の顔』(1940)で自分を含め、高田雄夫(1895~1929)と高田.. [도쿄1934공연] 5. 신진 무용가들 최승희는 데뷔 공연을 단행하면서 이시이 에이코의 데뷔 공연에 자극을 받았다고 했지만, 1934년 가을의 도쿄 무용계가 전반적으로 활기를 띄기 시작한 것도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신무용의 붐이 일기 시작했기 때문에 여기에 편승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일본양무사연표>를 보면 1930년대 초반 일본에서 실제로 신무용 붐이 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각 년도의 주요 신무용 공연 수의 추이를 보면 1926년의 9건, 1927년 8건, 1928년의 4건, 1929년의 10건, 1930년의 8건으로 1920년대 후반에는 연간 10건 이하로 유지되었으나, 1931년에는 14건, 1932년의 20건, 1933년과 1934년에는 25건으로 크게 늘었다. 1930년대의 신무용 붐은 서너 사람의 선구자가 주도한.. [東京1934公演] 4.石井英子 崔承喜が1934年秋「デビュー公演」を決心したのは当時の日本舞踊界の雰囲気が活発になったためだった。 そのきっかけは石井舞踊団の同僚石井英子の発表会だった。 これについて崔承喜は『私の自叙伝』(1936:127)でこのように述べている。 「石井先生門下であり、先生の妹さんの今は亡くなった石井榮子さんが第一回の發表會を開きました。その結果は非常に好評で榮子さんは振付の才能を一般から高く認められました。この發表會はこれ迄沈滞してゐた舞踊界の空氣を突き破つて新人舞踊家が續々として輩出して来さうな何となく新鮮た潑刺とした気配が醸成されて来たのです。 「自分自身の藝術の創作といふものに對しては貧困と闘びながらも日に日に燃えるやうな野心と熱情とにハチ切れさうになってゐた私が‘なんでこの気配に鈍感でゐられるでせうか。」 崔承喜は直ちに夫の安漠と相談した後、師匠石井漠の許諾を得て発表会を推進したが.. [도쿄1934공연] 4. 이시이 에이코 최승희가 1934년 가을 ‘데뷔공연’을 결심한 것은 당시 일본무용계의 분위기가 활발해졌기 때문이었다. 그 계기는 이시이무용단의 동료 이시이 에이코의 발표회였다. 이에 대해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1936:127)>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이시이 선생의 문하생이며, 선생의 여동생인, 지금은 돌아가신 이시이 에이코 씨가 제1회 발표회를 열었습니다. 그 결과는 매우 호평이었고 에이코씨는 안무의 재능을 일반에게 높게 인정받았습니다. 이 발표회는 지금까지 침체되어 있던 무용계의 분위기를 깨뜨렸고, 신인 무용가가 속속 배출되고 있다는 신선하고 발랄한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가난과 싸우면서도 자신의 예술 창작에 대해서는 나날이 불타는 야심과 열정에 달아올라 있었던 내가 이러한 분위기에 어떻게 둔감할 수 있었겠습니까.. 【東京1934公演】 3.苦難の行軍と新たな出発 1934年9月、崔承喜は22歳に過ぎなかったが、20回以上の主要公演に出演した6年経歴の舞踊家だった。 朝鮮と日本の地方公演を合わせると、彼の公演経験は100回を上回ったはずだ。 1939年1月31日、パリのサルプレイエル劇場で開かれた崔承喜のヨーロッパ初公演プログラムは「1934年と1937年の間に崔承喜は極東各地域で600回余りの公演を行い、約200万人が彼の舞踊を鑑賞した」と叙述した。 パリのガルニエ·オペラハウス図書館でこのパンフレットを78年ぶりに再発掘した筆者は、この紹介文を読みながら「誇張」だと思った。 4年間600回の公演なら1年に150回で、休まず週に3回ずつ公演したという意味だ。 累積観客が200万人だったとすれば、1回平均3300人が各公演を観覧したという話だ。 これが可能なことだったのか、疑わざるを得なかった。 しかし1936年3月10日に発行された「崔承喜.. [도쿄1934공연] 3. 고난의 행군과 새출발 1934년 9월 최승희는 22세에 불과했지만 20회 이상의 주요 공연에 출연한 6년 경력의 무용가였다. 조선과 일본의 지방 공연을 합하면 그의 공연 경험은 1백회를 상회했을 것이다. 1939년 1월31일 파리 살프레옐 극장에서 열린 최승희의 첫 유럽 공연 프로그램은 “1934년과 1937년 사이에 최승희는 극동 각 지역에서 6백여 회의 공연을 가졌고 약 2백만 명이 그의 무용을 감상했다”고 서술했다. 파리 가르니에 오페라하우스 도서관에서 이 팜플렛을 78년만에 재발굴한 필자는 이 소개문을 읽으면서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4년간 6백회의 공연이라면 1년에 150회이고, 쉬지 않고 일주일에 3번씩 공연했다는 뜻이다. 누적 관객이 2백만명이었다면 1회 평균 3천3백명이 각 공연을 관람했다는 말이다. 이게 가능.. 이전 1 ··· 5 6 7 8 9 10 11 ··· 6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