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90) 썸네일형 리스트형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20-2.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찾습니다. 첫 무용신을 선물하기 위해 고베를 방문했을 때 정세화 선생은 내게 자신의 절친 신도 도시유키(신도근동) 선생을 소개하셨다. 신도 선생은 정세화 선생의 부친 정홍영 선생과 함께 지역의 조선인 관련 사적을 답사하면서 연구 활동에 참여했던 분이었다. 고베의 니시노미야 지하호에서 “푸른 봄”과 “조선독립”이라는 벽서를 발견한 것도 정홍영-신도 도시유키 답사조였다. 정세화 선생은 이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거의 준비되었고 3월26일에 세워질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최승희 연구자인 내게 조선인 추도비 이야기를 자꾸 해 주시는 게 조금 의아했다. 그 의문은 고베를 떠나기 전, 정세화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나 식사를 하면서 풀렸다. 내가 시코쿠와 고베, 도쿄와 오사카 등을 방문하면서 동포 분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20-1. <무용신> 캠페인의 시작 2019년 11월 오사카 를 참관하면서 에 대해 처음 들었고, 2020년 1월 고베의 를 참관하면서 자세한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지만, 추도비에 대한 내 역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는 재일 조선학교의 무용부에 점점 끌렸고, 그들이야말로 1930년대에 일본 땅에서 조선무용을 처음 시작했던 최승희 선생의 진정한 후예들이라는 믿음이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이 학생들의 노력에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때마침 두 번의 만남으로 급속히 가까워진 정세화 선생이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정세화 선생이 나의 최승희 연구를 돕는 한편, 나는 조선학교를 도우라고 하신 것이다. 일본 내 인맥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최승희 연구를 돕겠다는 정세화 선생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20-0. 조선인 추도비 건립자들 일본 효고(兵庫)현 다카라즈카(寶塚)시에서 북쪽으로 5킬로미터쯤 떨어진 키리하타(切畑)의 나가오(長尾)산 기슭에는 조선인 추도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옛 국철 후쿠치야마선(福知山線) 폐선 부지에 조성된 벚꽃동산(桜の園) 입구, 신수이(新水) 광장에 세워진 이 비석은 라고 불리고 있다. 이 추도비가 건립된 것은 2020년 3월26일이다. 일제강점 초기인 1910-1920년대에 이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토목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하신 조선인 노동자 5인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현지의 일본인 시민과 재일동포들은 일본 초기 근대화를 위해 치러야 했던 이 분들의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 추도비를 건립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추도비의 전면에는 추도비 주인공들의 이름이 나란히 새..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19-5. 강제동원 피해자 조사 이상의 상황을 고려할 때 김상민 연구사의 설명은 대부분 설득력이 있었다. 경상남도 고성의 8만인구 중에서 이미 1920년대부터 상당한 비율이 일본으로 도항했고, 도항자의 대부분은 남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먼저 도항한 사람들이 주거와 일자리를 찾은 후 다른 가족들을 합류하도록 했기 때문에 노동이민자 수는 더욱 늘어났을 것이다. 윤길문씨의 경우도 아버지 윤재유, 삼촌 , 큰형 윤일선, 형수 여시선, 사촌형 윤창선 등의 가족들과 함께 다카라즈카로 이주하여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에서 터널 굴파 노동에 종사하던 중 사망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사망한 오이근씨도 오이목이라는 사람과 함께 거처하고 있었고, 두 사람의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아마도 형제이거나 적어도 사촌형제였을 것이다. 김상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19-4. 일제강점기 노동이민 앞에서 일제의 국민동원령이 시작된 1938-45년 사이에 약 1백80만명이 군인, 군속, 노무자로 해외로 강제 동원되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약 2천만명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거의 10명 중의 1명꼴로 조선 밖으로 강제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1938년 이후 ‘강제동원’ 피해자이다. 내가 연고를 찾고자하는 윤길문, 오이근씨는 1929년에 사망했으므로 국민동원령이 내려지기 전이었고, 따라서 자발적인 노동이민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여기서 ‘자발적’이란 용어는 ‘강제적’의 상대어로 쓰인 것일 뿐, 당시의 현실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요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첫째는 한일 합방 직후에 시행된 토지조사사업(1910-1918년)때문이었다. 일제의 토지조사는 지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19-3. 고성군의 강제동원 피해자 조사 김상민 선생이 지적한 ‘강제동원 피해자 조사’란 2004년에 시작된 조사를 가리킨다. 그해 3월5일 이 통과되었고, 11월에 가 발족되어, 첫 번째 업무가 ‘강제동원 피해자 조사’였다. 이후 2010년 3월22일에는 다시 이 제정되었고, 이 법률에 따른 를 신설했다. 피해자 조사와 함께 피해자들을 보상하고 지원하는 업무도 병행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한심한 일이다. 해방된 지 60년이나 지나,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본격적인 ‘강제동원 피해조사’가 체계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독재정부,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쿠데타 정부가 근대사의 질곡을 60년이나 연장시킨 것이다. 더구나 이들의 집권으로 양성된 반민족 정치인들은 민주정부의 ‘강제동원 피해조사와 보상’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나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19-2. 고성 군청의 자료연구사 고성군청에 들어가 우선 민원실을 찾았다. 차례를 기다렸다가 창구계원에게 ‘1백년전에 일본에서 사망하신 고성면민 윤길문, 오이근씨를 찾는다’고 말했다. 계원은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인지 미간을 찌푸리면서 나를 바라봤다. 이윽고 잠깐 기다려 달라면서 전화를 했다. 일상적 민원업무 외에 다소 복잡한 민원을 다루는 담당자가 따로 있었다. 나를 안내해 민원실 한 켠에 마련된 테이블로 안내한 특별 민원담당자에게 나는 똑같이 요청했다. 윤길문, 오이근씨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자 찾아왔다고 했다. 그 역시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 눈치였다. 나는 가져간 자료 폴더를 꺼내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했다. 사진과, 제사상 장면, 그리고 나무 위패에 이름이 적힌 사진 등을 보여주었다. “이분들이 1914년과 19..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19-1. 경남 고성, 공룡의 고향 고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군청으로 찾아갔다. 미리 전화를 걸어 방문의사를 밝히고 일정을 조정할 수도 있었겠으나, 그냥 민원실로 방문하기로 했다. 군청의 협조를 얻으면 일이 쉬워질 것이었고, 협조를 받지 못하더라도 바로 개인적인 조사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고성터미널에서 군청까지는 걸어서도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1929년에 ‘고성면’이라고 불렸지만 1938년 10월 ‘고성읍’으로 승격된 이래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그다지 많은 발전이 이뤄지지 못해왔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성은 변한12국의 하나인 고사포국(古史浦國) 혹은 고자국(古資國)의 영토였고, 서기 42년부터 461년까지 소가야(小伽倻)의 도읍지였다. 고자국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한조의 중국기록에는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일본 사기에.. 이전 1 ··· 8 9 10 11 12 13 14 ··· 6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