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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이야기

[마르세유1939공연] 7. 안막에 대한 오해들

최승희의 창작과 공연활동에서 안막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역할은 종종 과장되거나 왜곡되기도 했다. 최승희의 단발머리가 안막의 제안이었다든가, 안막이라는 필명은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모방한 것이라는 서술이 그런 것이다.

 

최승희가 안막과 결혼한 것은 19315월이었지만, 최승희는 19268월에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애교머리 없는 짧은 단발머리(short bobcut without bangs)”를 시작했고, 19447월까지 이 헤어스타일을 바꾸지 않았다.

 

 

이때는 최승희가 무용유학을 시작한 지 약 4개월이 지난 시점이었고, 1924년 미국의 무용가이자 영화배우 루이스 브룩스(Louise Brooks, 1906-1985)이 시작한 에집트 왕녀 스타일의 밥컷(bob cut)이 그 즈음 일본에 상륙해 대유행을 일으키고 있었다.

 

최승희는 루이스 브룩스의 에집션 밥컷을 채택했지만 다른 일본여성들과는 다르게 앞머리를 일자로 자르지는 않았다. 이같은 최승희 단발머리는 안막을 만나기 약 5년 전에 시작되었으므로, 이 단발머리가 안막의 제안이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불가능한 주장이다.

 

 

안막이 안필승이라는 본명대신 안막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것이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모방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오류이다. 이미 필자는 다른 글에서, 평전 중 이 주장을 수록한 것은 정수웅(2004)과 강준식(2012)뿐이며, 정병호(1995)안막이라는 이름이 이시이 바쿠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모 잡지사에서 지어준 필명이라고 반박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많은 연구서와 인터넷 포스팅에서는 안막이라는 필명이 이시이 바쿠를 모방한 것이라는 주장이 반복되고 있다. 팩트 체크에 철저하다는 위키피디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주장은 이미 근거 없는 도시 전설(urban legend)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안필승이 최승희와 결혼한 것은 19315월이고, 첫선을 본 것은 그로부터 몇 달 전이므로 19312월경이었다. 그러나 안막이라는 필명이 신문기사에 등장한 것은 적어도 그보다 2년 전인 19297월이었다. 1929716일의 <동아일보> 기사에 그의 이름이 안막(安漠)으로 소개되었던 것이다. 최승희를 만나기 훨씬 전의 일이다. 이에 대해 최승희도 <나의 자서전(1936: 93-94)>에서 안막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는 안필승이라는 이름보다 안막이라는 이름으로 통했습니다. 나중에 이시이 선생님의 성함을 무단으로 베낀 이름이라며 수상하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만, 안막이라는 이름은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니라 집필하고 있던 신문사가 마음대로 붙여준 필명으로, 그것이 일반인들이 그를 부르는 이름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병호(1995)모 잡지사에서 지어준 필명이라고 했지만, 최승희(1936)신문사가 붙여준 필명이라고 했다. 안막이 잡지사와 신문사에 발표한 글을 모두 조사해 보니, 안막의 글을 가장 많이 게재한 신문은 <중외일보>였다. 1930년 한 해에만도 <맑스주의 예술 비평의 기준>, <조직과 문학>, <조선프로예술가의 당면한 긴급한 임무> , 장문의 평론을 잇달아 연재하면서 <중외일보>의 필진으로 활약했고, 이 모든 글은 안막이라는 필명으로 기고되었다.

 

<중외일보>가 안필승(安弼承, 1910~?)에게 필명을 지어준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동명이인의 문필가 안필승(安必承, 1909-?)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안막과 비슷한 시기에 문예활동을 시작했고, <중외일보>를 비롯한 일간신문과 문예잡지에 왕성하게 기고하고 있었다.

 

 

그는 <금수회의록>의 작가 안국선의 아들로 이미 유명인이었고, 후일 안회남(安懷南)으로 개명했다. <중외일보>가 이 두 안필승을 구별하기 위해 안필승(安弼承)에게 안막(安漠)이라는 필명을 지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안막이라는 필명이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평론가 안필승에게 적절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한자 막()마르크스를 음차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jc, 2023/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