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611) 썸네일형 리스트형 [대륙14학교] 12. 김동기 강연 (1) 지정학 14기의 세 번째 강연은 김동기 선생의 이었습니다. 그는 이라는 저서로 최근 널리 알려졌지만, 지정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적어도 1995년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한국국방연구원이 출판한 이라는 정책보고서에 “동북아의 군비 증강”이라는 그의 논문이 실렸더군요. 김동기 선생의 강연을 듣기 전까지 ‘지정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일천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지리적 환경을 국제정치의 주요 변수로 상정한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었지요. 즉, 지정학은 인간 의지를 도외시하는 환경결정론처럼 보였습니다. 유럽의 19세기는 결정론의 시기였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이 된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이 대표적이지만, 인간의 우열이 체형에 의해 결정된다는 우생학적 결정론은 나치즘의 기반이 되었고, 심지어 범죄자까지도 유전.. [中南米巡回公演] 9.プエルトリコ公演前後(8)ハバナ公演(?) 1939年11月末、崔承喜がキューバを訪問したが、公演はなかったと私は判断した。 ハバナ公演に対する具体的な記録が見つからなかったためだ。 キューバ公演の日付と劇場を報道した新聞や雑誌は発掘されておらず、その公演のプログラムやパンフレットも発見されていない。 しかし、ハバナ公演の可能性を完全に排除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 「ハバナ公演」を報道した2件の記事があったためだ。 まず1940年1月27日の『東亜日報』は崔承喜が同紙に送った手紙を引用して次のように報じた。 「九州に動乱が起き、残念ながら避難船に乗ってニューヨークに戻ることになった。 アメリカに渡ると、と契約を結び、南米のハバナロ公演の旅に出て、そこで多くの収穫を収め、去る(1939年)12月中旬に再びニューヨークに戻った」 朝鮮で『東亜日報』の記事が報道されてから3日後の1940年1月30日、満州の『滿鮮日報』も同じ内容を報道.. [중남미 순회공연] 9. 푸에르토리코 공연 전후 (8) 하바나 공연(?) 1939년 11월말, 최승희가 쿠바를 방문했지만 공연은 없었다고 나는 판단했다. 하바나 공연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바 공연의 날짜와 극장을 보도한 신문이나 잡지가 발굴된 바 없고, 그 공연의 프로그램이나 팜플렛도 발견된 바 없다. 그러나 하바나 공연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하바나 공연”을 보도한 2건의 기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1940년 1월27일의 는 최승희가 이 신문사에 보낸 편지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구주에 동란이 일어나 유감스럽게도 피난선을 타고 뉴욕으로 다시 가게 되었다. 미국에 건너가자 와 계약을 하여 남미 하바나로 공연의 길을 떠나 거기서 많은 수확을 거두고 지난 (1939년) 12월 중순에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조선에서.. [中南米巡回公演] 8.プエルトリコ公演前後(7)キューバのルンバ 1939年11月、崔承喜がパナマからニューヨークに帰る途中にキューバに立ち寄ったという記録はあるが、このキューバ訪問に対する具体的な記述はない。 『三千里(1940年5月号)』に掲載された崔承喜の寄稿文で、「キューバでルンバを観覧した」という記述が全てだ。 崔承喜はこの時、なぜキューバを訪問したのか? 映画「ゴッドファーザー2編(The Godfather Part II、1974)」にも描かれているように、革命前のキューバは裕福なアメリカ人の観光地だった。 しかし、崔承喜一行が観光目的でキューバに立ち寄ったようではなかった。 チェ·スンヒとアン·マクは朝鮮でも、日本でも、ヨーロッパでも観光目的で旅行したり、名士たちとの社交会に参加したことがない。 第一に、観光や社交に使うお金と時間がなく、第二に、公演以外のことには全く関心がなかったためだった。 したがって1939年11月、チェ·スン.. [중남미 순회공연] 8. 푸에르토리코 공연 전후 (7) 쿠바의 룸바 1939년 11월 최승희가 파나마에서 뉴욕으로 돌아가는 길에 쿠바에 들렀다는 기록은 있으나, 이 쿠바 방문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은 없다. 에 실린 최승희의 기고문에서 “쿠바에서 룸바를 관람했다”는 서술이 전부다. 최승희는 이때 왜 쿠바를 방문했을까? 영화 에도 묘사되었듯이 혁명 전의 쿠바는 부유한 미국인들의 관광지였다. 그러나 최승희 일행이 관광 목적으로 쿠바에 들렀을 것 같지는 않았다. 최승희와 안막은 조선에서도, 일본에서도, 유럽에서도 관광목적으로 여행하거나 명사들과의 사교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다. 첫째, 관광이나 사교에 쓸 돈과 시간이 없었고, 둘째, 공연 이외에 다른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939년 11월, 최승희가 파나마에서 뉴욕으로 항해하던 중에 쿠바에 들렀던 것은, .. [中南米巡回公演] 7.プエルトリコ公演前後(6)パナマの闘牛 1940年4月8日、大陸横断列車に乗ってサンフランシスコを出発した崔承喜がシカゴを経由してニューヨークに到着したのは4月11日か4月12日だっただろう。 カリブ海島嶼国家での公演は初めてだったので、崔承喜一行は現地適応のためにも遅滞なくプエルトリコに出発したはずだ。 崔承喜がカリブ海地域を訪問したのは今回が初めてではなかった。 半年前の1939年10月21日、崔承喜一行はニューヨーク入国ビザを取得できず、5日間の臨時滞在の後、10月26日に汽船に乗ってパナマに出発したことがあった。 ニューヨークを出発してパナマ海峡を渡ってLAかサンフランシスコに行き、そこで太平洋を渡って日本に行く船便に乗り換える計画だったはずだ。 1930年代、米東部海岸からパナマを経て米西部海岸を結ぶ航路はが旅客輸送を担当したが、、、の3隻の旅客船がこの航路を運航した。崔承喜がこのうちどの船に乗船していたのかはまだ.. [중남미 순회공연] 7. 푸에르토리코 공연 전후 (6) 파나마의 투우 1940년 4월8일 대륙횡단 기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최승희가 시카고를 경유해 뉴욕에 도착한 것은 4월11일이나 4월12일이었을 것이다. 카리브해 도서국가에서의 공연은 처음이었으므로 최승희 일행은 현지적응을 위해서라도 지체 없이 푸에르토리코로 출발했을 것이다. 최승희가 카리브해 지역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반년 전인 1939년 10월21일, 최승희 일행은 뉴욕 입국비자를 얻지 못해 5일간의 임시 체류 후, 10월26일 기선에 올라 파나마로 출발한 적이 있었다. 뉴욕에서 출발해 파나마해협을 건너서 LA나 샌프란시스코로 갔다가, 그곳에서 태평양을 건너 일본으로 가는 선편으로 갈아탈 계획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 미동부 해안에서 파나마를 거쳐 미서부 해안을 연결하는 항로는 이 여객수.. [中南米巡回公演] 6.プエルトリコ公演前後(5)中南米巡回公演の企画 当初、崔承喜はニューヨーク公演とシカゴ公演を終えた後、サンフランシスコに移動し、そこから船で日本に帰る計画だった。 ところがシカゴ公演時期に米国西海岸都市の公演要請が入り、これに崔承喜が積極的に応じた結果、米国西海岸巡回公演が始まった。 それでは崔承喜が日本に帰ろうとする計画を修正し、中南米公演に出ることにした決定はいつ下されたのだろうか? 中南米巡回公演の計画が真っ先に報じられたのは1940年3月19日の『カシュー毎日新聞(英語版、5面)』だった。 この記事は崔承喜が3月30日のLA公演のために3月19日ユニオン駅に到着する予定だと報道し、今後の公演計画について次のように付け加えた。 「米国巡回公演中の崔承喜はLA公演を終えて南米に向かう予定だが、そこでチリ、アルゼンチン、ウルグアイ、ブラジルで一連の公演を行うことになる。 崔承喜は4月3日、楽洋丸に乗船し、バルパライソ(Valpar.. 이전 1 ··· 56 57 58 59 60 61 62 ··· 7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