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503) 썸네일형 리스트형 <무용신>이 제24회 <강릉인권영화제>를 후원합니다 가 9월9-10일 강릉시 월화거리에서 열립니다. 이번 강릉인권영화제의 주제는 “노동자의 인권”입니다. 과 자매단체들은 제24회 강릉인권영화제를 후원합니다. 저희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효고현 다카라즈카에서 조선인 노동자 5분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음을 알았고, 이들을 108년 동안 위령 제사하고, 2020년 이들을 위한 추도비를 세우신 분들이 계심을 알게 됐습니다. 저희는 희생자의 한 분인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릉이었음을 밝힌 후, 강릉시가 추도비 건립자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해 줄 것을 청원했습니다. 이 청원은 받아들여져서 2022년 4월 강릉시장 명의의 감사패가 6명의 일본인과 2명의 재일동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후 한국동포들과 재일동포들의 추도비 참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과정이 재일동포 사진가 .. [남미취재] 0. 준비의 시작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崔承喜の写真] 2.世紀のスクープ 淑明女学校の卒業式直後の崔承喜(チェ·スンヒ)の写真がもう一枚あります。 1926年3月25日の『京城日報(3面)』に掲載された写真です。 その後、世界各国で数百のメディアが数千枚あるいは数万枚の崔承喜の写真を報道したでしょうが、のこの写真がメディアで報道された最初の崔承喜写真です。 世紀のスクープ写真だったわけです。 しかし、このスクープ写真の画質が良くありません。 まるで急いで現像して光が入ったせいで曇ったように見えます。 1920年代の新聞社の写真記者なら撮影だけでなく、現像とプリントに印刷用製版まで担当した専門家です。 それでも写真がこんなに粗末に現象していたら、きっと何か事情があったはずです。 写真が載った記事がインタビュー記事なので、この写真はインタビューの途中か前後に撮影した写真でしょう。 ところが、このようにぼやけた写真をそのまま掲載しました。 代替する他の写真がなかっ.. [최승희 사진] 2. 세기의 특종 숙명여학교 졸업식 직후의 최승희 사진이 한 장 더 있습니다. 1926년 3월25일 에 실린 사진입니다. 이후 세계 각국에서 수백 개의 매체가 수천 장 혹은 수만 장의 최승희 사진을 보도했겠지만, 의 이 사진이 언론 매체에 보도된 최초의 최승희 사진입니다. 세기의 특종 사진이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이 특종 사진의 화질이 좋지 않습니다. 마치 급히 현상하다가 빛이 들어가는 바람에 흐려진 것처럼 보입니다. 1920년대의 신문사 사진기자라면 촬영뿐 아니라 현상과 인화에 인쇄용 제판까지 담당했던 전문가입니다. 그런데도 사진이 이렇게 허술하게 현상되었다면 필시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진이 실린 기사가 인터뷰 기사이므로 이 사진은 인터뷰 도중이나 전후에 촬영한 사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흐려진 사진을 .. [崔承喜の写真] 1.渡日即時 ここに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の舞踊留学初期の写真が一枚あります。 この写真は(1)高島雄三郎と鄭昞浩(チョン·ビョンホ)編集の写真集と(2)鄭昞浩の評伝、(3)金贊汀(キム·チャンジョン)の評伝と(4)鄭秀雄(チョン·スウン)の写真集にも載っています。 すでに広く知られている写真という意味です。 しかし、この写真が「いつ、どこで」撮影されたのか明確ではありません。 また、この写真が「なぜ」撮影されたのか、「どのように」使われたのかも定かではありません。 各文献ごとに説明が異なるからです。 (1)は"1926年(崔承喜が)日本に渡る一ヶ月前"に撮った写真だそうです。 崔承喜は1926年3月25日京城を出発して4月1日に東京に到着しましたので、(1)の説明によると、この写真は1926年2月末か3月初めに京城で撮影された写真です。 (2)は「崔承喜が東京に発つ前」に撮った「16歳の時」の.. [최승희 사진] 1. 도일 즉시 여기 최승희 선생의 무용 유학 초기의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이 사진은 (1) 다카시마 유사부로(高嶋雄三郞)와 정병호 편집의 사진집 와 (2) 정병호의 평전 , (3) 김찬정의 평전 와 (4) 정수웅의 사진집 에도 실려 있습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사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이 ‘언제, 어디서’ 촬영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또 이 사진이 ‘왜’ 촬영됐는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각 문헌마다 설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은 “1926년 (최승희가) 일본으로 건너가기 한 달 전”에 찍은 사진이라고 했습니다. 최승희는 1926년 3월25일 경성을 출발해 4월1일에 도쿄에 도착했으니, (1)의 설명대로라면 이 사진은 1926년 2월말이나 3월초에 경성에서 촬영된 사진이겠.. 연해주 <고려인 민족학교>를 후원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조정희(4회)입니다. 저는 2017년부터 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공연을 조사연구하는 한편, 2020년부터 이라는 모임을 통해 재일 조선학교 무용부를 후원해 왔고, 프로그램이 확장되어서 작년 8월부터는 연해주 고려인 학교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연해주의 가 위기에 처한 것을 알게 되어 도움을 부탁드리려고 이 글을 드립니다. 최재형(崔在亨, 1860-1920) 선생님은 연해주의 덕망 있으신 독립운동가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지원했고, 안중근 선생 사후 그 가족을 돌보신 분입니다. 1919년 만세운동 직후 결성된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으로 선임되었으나, 1920년 연해주에 진주한 일본군 헌병대에 의해 간첩(=독립운동가) 혐의로 체포, 사살되셨습니다. 는 이분의 이름을 딴 연해주 우수리.. [칼의 노래] 4. 이순신의 ‘자연사’ 임진왜란은, 일본 열도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에게 충성하는 맹주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는 주장이라고 본다. 봉건시대의 백성은 땅에 묶여있었다. 백성의 농사 소출에서 세금을 거두는 것이 곧 지배자들의 소득이었다. 일본 열도의 소출로 나누어줄 세금이 마르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해 거기서 거둘 세금을 지방 군주들에게 약속한 것이다. 조선 왕도 마찬가지였다. 공자니 맹자니, 유교니 불교니 떠들었지만, 조선 왕조가 탐했던 것은 백성의 세금이었을 뿐이다. 그 세금을 왜가 빼앗으려 하자 외세를 끌어들여서라도 그 세금을 지키고자 했다. 조선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출병한 명나라 군대는 조선을 지켜봐야 딱히 자기들에게 떨어질 세금이 새로 생기는.. 이전 1 ··· 50 51 52 53 54 55 56 ··· 6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