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503) 썸네일형 리스트형 [6개의 오해들] <나의 자서전>이 풀어준... (7) 결론 7. 결론 오늘날 한국인 중에는 최승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그의 삶과 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에 대한 오해도 적지 않다. 이러한 오해는 부분적으로 자료부족 때문이지만, 더 많은 경우에 기존의 자료나마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글은 최승희의 이라는 오래된 새로운 문헌을 도입하고, 이를 다른 자료들과 비교하거나 종합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최승희의 삶과 춤에 대한 기존의 오해와 오류들이 풀릴 수 있음을 보이려는 시도였다. 은 최승희가 불과 25세였던 1936년에 일본어로 출판한 자서전이다. 최승희 연구의 1차 자료인 이 자서전이 그동안 일반 독자는 물론 연구자들 사이에도 활용되지 못한 것은 그것이 아직까지도 번역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자서전이 미리 번역되었더라면 아예 발생조차 하.. [6개의 오해들] <나의 자서전>이 풀어준... (6) 조선무용 6. 최승희의 무용은 ‘조선무용’인가? 최승희가 1933년 5월 를 발표하면서부터 그의 작품은 ‘조선무용’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최승희는 일본과 유럽 무대에서 와 와 , 과 과 [6개의 오해들] <나의 자서전>이 밝혀준... (5) 페미니스트 5. 최승희는 여성주의자인가? 세계 순회공연 중 최승희가 1938년 12월 파리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 언론인 협회장 삐에르 드노이에(Pierre Denoyer, 1901-1965)는 12월24일의 파리 일간지 에 최승희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여성해방은 극동에서는 최근의 일이다. 한국의 유서깊은 가문에서 태어난 어린 소녀가 무용을 직업으로 선택했을 때 한국의 수도 서울의 존경받는 시민인 아버지 최준현씨에게는 기괴하게 들렸을 것이다. 특히 15세의 딸이 저명한 일본 도쿄의 무용가 이시이 바쿠를 따라가겠다고 말했을 때는 그는 숨이 끊어질 듯싶었을 것이다.” 드노이에의 눈에 최승희는 극동 “여성해방(L'émancipation des femmes)”의 화신이었다. 귀족(=양반) 가문의 젊은 여성이 무용을 직.. [6개의 오해들] <나의 자서전>이 풀어준... (4) 안막 4. 남편 안막의 이름 최승희의 남편 안필승의 필명 ‘안막’에 대한 오해가 있어왔다. ‘막(漠)’이라는 이름이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소문이다. 이 소문의 근거는 희박하다. 남북한과 일본에서 출판된 8권의 평전 중 이 주장을 서술한 것은 정수웅(2004)과 강준식(2012)뿐이다. 심지어 정병호(1995)는 ‘안막’이라는 이름은 이시이 바쿠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모 잡지사에서 지어준 필명”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많은 연구서와 인터넷 포스팅은 ‘안막이라는 필명이 이시이 바쿠를 모방한 것’이라는 주장을 수용하고 있다. 팩트 체크에 철저하다는 위키피디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주장은 이미 도시 전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시인 백기행(白夔行, 1912.. [6개의 오해들] <나의 자서전>이 풀어준... (3) 월반 3. 숙명여학교 월반에 대한 오해 평전들은 최승희의 학창시절을 서술하면서 월반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최승희가 똑똑하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기에는 이만큼 좋은 에피소드가 없었을 것이다. 서만일(1957)은 최승희가 “여학교 시절에 남달리 총명하고 근면하여 성적이 우수했고 마침내는 최우등생으로서 3학년에서 5학년으로 월반까지 하게 되었다”고 썼다. 다카시마 유사부로(1958)도 “당시 조선의 소학교(=초등학교)의 제도로서 성적이 좋으면 1년이나 2년까지 월반이 행해졌는데, 그녀도 월반의 혜택을 받아 서울의 숙명여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반에서 가장 키가 작고 나이도 가장 어렸다”고 했다. 강이향(1993)은 “뛰어난 성적으로 월반까지 하여 남들보다 먼저 소학교를 졸업”했다고 했고, 정병호.. [6개의 오해들] <나의 자서전>이 풀어준... (2) 몰락 2. 경제적 몰락의 이유 모든 평전과 연구서들은 최승희가 여학교 1학년 시절에 아버지 최준현이 경제적으로 몰락했다고 서술했고,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그 원인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다면 이러한 서술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첫째, 시기의 문제이다.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은 1910년에 시작되어 1918년에 끝났다. 최승희 집안이 여학교 1학년 때 몰락했다면 그것은 1922년 4월부터 1923년 3월 사이의 일이다. 즉, 토지조사사업 자체가 최승희 집안의 경제적 몰락의 직접 원인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특히 최승희가 태어난 경성부 서부 지역의 토지조사사업은 1913년에 끝났고, 부친 최준현의 토지가 있던 강원도 홍천지역의 토지조사사업은 1916년에 .. [6개의 오해들] <나의 자서전>이 풀어준... (1) 서울 출생 1. 최승희는 서울 태생 대부분의 평전들은 일관되게 최승희의 출생지는 경성, 즉 서울이라고 서술했다. 그러나 그녀가 홍천 태생이라는 설도 있다. 한국에서 최승희의 고향이 강원도 홍천이라는 주장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89년이었고, 2006년에는 의 함광복 기자가 “우린 왜 '최승희의 홍천'을 찾아야 하는가”라는 장문의 글을 통해 최승희의 출생지는 “강원도 홍천군 남면 제곡리 237번지 혹은 244번지”라고 주장했다. 2006년이면 최승희 탄생 1백주년(2011년)을 앞두고 남,북한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 각종 추모행사가 기획되면서 최승희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최승희의 홍천 출생설은 ‘새로운 발견’으로 ‘화젯거리’가 되었고 들불처럼 번졌다. 오늘날 대부분의 최승희 연구서들이 ‘홍천 출생.. [6개의 오해들] <나의 자서전>이 풀어준... (0) 서론 최승희의 이 풀어준 6개의 오해 조정희 (최승희 연구가), 2021년 2월18일, 의 개막을 축하하며..., 0. 서론 나의 최승희 조사연구가 4년째다. 최승희의 삶과 춤에 대한 적지 않은 이해를 갖게 됐지만, 여전히 의문으로 남은 문제도 많다. 자료 부족은 손쉬운 핑계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세계 곳곳에 산재한 최승희 관련 자료를 찾아내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문헌 사이에도 불일치가 적지 않다. 최승희 평전과 연구서, 신문과 잡지의 기사들 사이에 엇갈리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인터넷 포스팅은 말할 것도 없다. 또 기존 문헌들 사이에 일치된 사안이라도 과연 그것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의심할 내용도 있다. 최근 최승희의 을 다시 읽으면서 이 책이 그 같은 불일치.. 이전 1 ··· 49 50 51 52 53 54 55 ··· 6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