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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자서전

[6개의 오해들] <나의 자서전>이 풀어준... (7) 결론

7. 결론

 

오늘날 한국인 중에는 최승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그의 삶과 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에 대한 오해도 적지 않다. 이러한 오해는 부분적으로 자료부족 때문이지만, 더 많은 경우에 기존의 자료나마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글은 최승희의 <나의 자서전>이라는 오래된 새로운 문헌을 도입하고, 이를 다른 자료들과 비교하거나 종합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최승희의 삶과 춤에 대한 기존의 오해와 오류들이 풀릴 수 있음을 보이려는 시도였다.

 

 

<나의 자서전>은 최승희가 불과 25세였던 1936년에 일본어로 출판한 자서전이다. 최승희 연구의 1차 자료인 이 자서전이 그동안 일반 독자는 물론 연구자들 사이에도 활용되지 못한 것은 그것이 아직까지도 번역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자서전이 미리 번역되었더라면 아예 발생조차 하지 않았을 오해들도 적지 않다.

 

이 글에서는 그 같은 오해들 중에서 6개만 골라 해명했다. 그중 3가지, 즉 최승희의 출생지에 대한 논란과 그의 집안이 경제적으로 몰락한 까닭, 그리고 남편 안막의 필명에 대한 오해는 <나의 자서전>의 서술 한두 줄로 간단히 해결될 수 있었다.

 

반면, 숙명여학교에서의 월반 문제는 <나의 자서전>의 서술로는 해명되지 않았지만 당시의 학제 변화와 최승희의 진학 과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보통학교 재학 중의 월반이 아니라 보통학교에서 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는 중간 단계에서 생긴 예외적 월반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여성주의자와 조선무용의 문제는 앞의 4가지 오해보다는 훨씬 복잡한 문제이지만, <나의 자서전>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나의 자서전>에 나타난 최승희의 삶과 춤의 여정을 살펴보면 최승희는 당대의 기준으로는 물론 오늘날의 급진적 여성주의자의 정의에 부합되지 않는다.

 

또 최승희의 작품이 조선무용인가의 문제도 <나의 자서전>의 서술과 이후 활동, 그리고 그의 무용 활동의 집대성으로서의 <조선민족무용기본>을 비교할 때, 그의 작품을 조선무용으로 부르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밖에도 최승희의 삶과 춤에 대한 근거가 희박한 도시전설급 오해가 세간에 많이 그리고 널리 퍼져있다. 그러한 오해의 상당 부분은 일차 자료인 <나의 자서전>을 통해 풀릴 수 있거나, 적어도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비록 많이 늦었더라도 이 자서전의 번역은 꼭 필요하다. 그리고 이 책을 번역할 때에는 다음의 3가지 사항이 유의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일어판 <나의 자서전(1936)>과 조선어판 <나의 자서전(1937)>은 제목도 같고 자서전적 서술인 점에서는 같으나 내용이 겹치는 부분은 거의 없다. 특히 장별로 비교하면 같은 내용을 서술한 똑같은 글이 전혀 없다. 따라서 일어판을 번역한 후에 이를 조선어판의 서술과 비교하면서 두 책의 각 장들을 시기 순으로 적절히 편집하면 좋을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는, <나의 자서전>을 번역할 때 적지 않은 주해가 필요할 것이다. 일어판 <나의 자서전>은 이미 80년 이상 오래된 저술이다.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무리 없이 읽힐 수 있었겠으나 당시의 시대상이나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보충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나의 자서전>을 번역할 때에는 본문 번역뿐 아니라 독자의 이해에 도움이 될 배경설명이 추가된 주해서 형식의 번역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나의 자서전>을 번역, 주해, 편집할 때 최승희 자신의 기록뿐 아니라 당대 무용 동료들의 기록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와 동료인 이시이 코나미, 이시이 미도리, 이시이 에이코 등의 기록은 최승희를 이해하는 데에 꼭 필요하다. 특히 이시이 바쿠의 자서전 <춤추는 바보(1955)>는 최승희의 <나의 자서전>과 함께 반드시 번역되어야할 책일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