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남편 안막의 이름
최승희의 남편 안필승의 필명 ‘안막’에 대한 오해가 있어왔다. ‘막(漠)’이라는 이름이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소문이다.
이 소문의 근거는 희박하다. 남북한과 일본에서 출판된 8권의 평전 중 이 주장을 서술한 것은 정수웅(2004)과 강준식(2012)뿐이다. 심지어 정병호(1995)는 ‘안막’이라는 이름은 이시이 바쿠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모 잡지사에서 지어준 필명”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많은 연구서와 인터넷 포스팅은 ‘안막이라는 필명이 이시이 바쿠를 모방한 것’이라는 주장을 수용하고 있다. 팩트 체크에 철저하다는 위키피디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주장은 이미 도시 전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시인 백기행(白夔行, 1912-1996)이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琢木, 1886-1912)의 이름 일부를 가져와 백석(白石)이라는 필명을 지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안필승이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가져와 필명으로 사용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더구나 안필승이 아내 사랑과 아내의 스승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 것이라면 당대나 혹은 지금도 미담으로 여겨질 수 있다.
문제는 이 주장이 사실일 수 없다는 점이다. 안필승이 최승희와 결혼한 것은 1931년 5월이고, 첫선을 본 것은 그로부터 몇 달 전이므로 1931년 2월경이었다. 그러나 안막이라는 필명이 신문기사에 등장한 것은 적어도 그보다 2년 전인 1929년 7월이었다.
당시 도쿄유학생들은 방학을 이용해 조선을 순회하며 연극공연과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여기에 안필승도 강연자로 포함되었다. 이를 보도한 1929년 7월16일의 <동아일보> 기사에는 그의 이름이 안막(安漠)으로 소개되어 있다. 최승희를 만나기 훨씬 전의 일이다.
이에 대해 최승희도 <나의 자서전>에서 안막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는 안필승이라는 이름보다 안막이라는 이름으로 통했습니다. 나중에 이시이 선생님의 성함을 무단으로 베낀 이름이라며 수상하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만, 안막이라는 이름은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니라 집필하고 있던 신문사가 마음대로 붙여준 필명으로, 그것이 일반인들이 그를 부르는 이름이 되어 있었습니다.”
최승희의 자서전이 미리 번역되었다면 평전과 연구서, 위키피디어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의문이 있다면, 안필승에게 안막이라는 필명을 지어준 것이 어느 신문사이었는가, 그리고 정병호(1995)는 어째서 이를 ‘잡지사’라고 서술했는가, 이다.
정병호의 말대로 ‘잡지사’였다면 일본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기관지 <나프>였을 수 있다. 이 잡지의 1931년 3월호에 안막이 <조선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의 현실적 상황>이라는 1만5천자(10쪽)의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한편 1932년의 <사상월보> 1권10호에도 안막의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약사>라는 장문의 논문(51쪽)이 실렸지만, 이 간행물은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에서 사상범의 동향을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발간한 것이므로 고등검사들이 안막에게 필명을 지어주었을 리 없다.
안막이라는 필명을 권한 것이 신문사였다면 <중외일보>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안막은 1930년 한 해에만도 <맑스주의 예술 비평의 기준>, <조직과 문학>, <조선프로예술가의 당면의 긴급한 임무> 등, 장문의 평론을 잇달아 연재하면서 <중외일보>의 주요 필진으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외일보>가 안필승(安弼承, 1910~?)에게 필명을 권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와 연배가 비슷하고 문단 활동 시기도 겹치면서 한국어 이름까지 같은 작가 안필승(安必承, 1909-?)과 구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사회주의 성향의 <중외일보>가 막(漠)이라는 특정 이름을 권한 것은 실력 있고 유망한 카프 평론가 안필승에게 사회주의 이론가 마르크스(Karl Marx)와 비슷한 음가의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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