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90) 썸네일형 리스트형 [대륙14학교] 34. 배은선 강연-외전 (2) 최승희와 경인선 기록에 나타난 조선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최초의 기차여행은 1922년 5월26일의 숙명여학교 수학여행이었다. 당시 최승희는 만10세로 숙명여학교 1학년생이었다. 1922년 5월29일의 는 이 수학여행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경성사립숙명여학교 고등과 학생 183명과 초등과 생도 333명은 직원15인의 인솔 하에 ... 래인(來仁, 인천을 방문)하여 시가(市街)와 동,서공원, 그리고 관측소와 축항(築港) 및 기타 여러 곳을 순람(巡覽=차례로 관람)하고 당일 하오6시15분 인천역발(發) 열차로 귀교하였다더라.” 이 기사에는 ‘수학여행’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이런 식의 학생 여행은 1910년대부터 수학여행이라고 불렸다. 1914년 1월11일의 는 “숙명여학교에서는 직원과 생도 일동 89명이 수학여행하기 위.. [대륙14학교] 33. 배은선 강연-외전 (1) 최승희의 기차 여행 배은선 선생의 한국의 철도에 대한 강연을 듣고, 이를 정리하며 복습하는 과정에서, 조선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철도여행이 머릿속에 겹쳐지곤 했다. 최승희 선생이 조선과 일본과 중국, 유럽과 미주에서 순회공연을 했던 것은 192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까지였으므로 그의 주요 교통수단은 바다에서는 여객선이었고 육지에서는 철도였다. 항공기가 보편적인 여객 수송의 수단이 된 것은 1950년대 이후이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조선 순회공연에 나섰던 1929-1933년 경인선과 경의선과 경부선, 호남선과 경전선, 군산선과 전라선, 경원선 등 철도를 이용했던 사실은 신문보도를 통해 거듭 확인됐다. 버스로 이동했던 유일한 공연은 춘천 공연이었다. 경춘선 철도는 1939년에야 가설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일본 순회공연에서.. [대륙14학교] 32. 배은선 강연 (5) 대륙철도 청나라와 러시아의 견제를 뚫고 조선 강점을 진행시키던 일본은 철도 부설에서도 미국과의 경쟁을 제치고 조선 철도를 모두 손아귀에 넣었다. 일제가 조선철도를 필요로 했던 것은 조선 강점에 머물지 않고 대륙 침략을 위해서였다. 따라서 일제는 한편으로 경부선(부산-경성)과 경의선(경성-의주)을 부설해 중국의 단둥으로 연결되도록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원선(경성-원산)과 함경선(원산-회령)을 부설해 블라디보스톡에서 시작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되도록 했다. 대륙으로 연결되는 제3의 노선으로 일제는 1939년 만포선(순천-만포)을 개설했다. 지금은 북한에서도 평양에서 묘향산에 가기 위해 활용하는 정도에 그친다고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만포에서 센양, 창춘, 지린, 하얼빈까지 도달할 수 있는 대륙철도의 역할을 .. [대륙14학교] 31. 배은선 강연 (4) 조선과 필리핀 나눠먹기 조선철도 건설 경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은 그것이 일본 ‘정부’와 미국 ‘기업’의 대결이었기 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한반도 침략과 대륙 침공을 목표로 치밀하게 조선철도 건설에 뛰어든 반면, 미국은 기업 영리를 추구하는 데에 그쳤던 것이다. 이 시기에 미국은 스페인과 전쟁 때문이었다. 카리브 해에서는 쿠바가 10년 전쟁(1868-1878)과 1879-1880년의 무장봉기로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지만, 1895년 재차 전쟁을 시작했다. 미국은 이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공급하면서, 카리브해에서 스페인을 몰아내려고 했다. 1898년 쿠바로 파견된 미국 전함 메인호가 2월15일 밤 아바나 항구에서 폭발과 함께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미국은 이 사고를 스페인의 소행이라고 단정하고 4월11.. [대륙14학교] 30. 배은선 강연 (3) 미국과 일본의 경인철도 경쟁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1868) 이후 정한론이 대두되었고, 일본 국내 철도 가설이 본격화되면서, 조선철도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조선을 침략하고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조선에 철도를 가설하고 이를 일본이 차지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경인철도 가설을 위해 먼저 나선 것은 미국이었다. 1883년 6월23일 미국 정부는 독변교섭통상사무 민영목을 통해 제물포와 한강의 수심 측량 허가를 받았고, 1887년 2월9일 조선영사 프레이저(E. Frazar)가 김윤식에게 “전등 및 철도 신설계획의 요청” 공문을 보낸 바 있었다. 또 고종은 1891년 3월 이완용과 이하영을 시켜 주한미국전권공사인 기업가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와 “철도창설조약”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는데, 모스는 .. [대륙14학교] 29. 배은선 강연 (2) 경인철도 기공식이 있기까지 한국철도의 슬픈 역사는 고종의 애비 대원군과 그의 마누라 민씨의 정권 투쟁을 배경으로 진행됐다. 어린 고종의 섭정으로서 풍양조씨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타파한 대원군은 그 대신 여흥민씨의 세도정치를 초래했다. 역설적인 것은 대원군이 불러들인 여흥민씨 세도정치로 왕비가 된 민씨와의 권력투쟁에서 대원군 자신이 패배했다는 점이다. 1878년 고종의 친정 시작으로 권력에서 쫓겨난 대원군은 고종의 무능과 외척의 세도정치로 나라가 문란해지고 있다며 개탄하던 중, 훈련도감의 구식군대가 일으킨 임오군란(1882)을 이용해 민비가 양성한 사병 별기군을 제압하면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쿠데타는 일본 공관의 방관과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청나라가 군대를 철수하자, 친일파 김옥균과 박영효 등이 일본.. [대륙14학교] 28. 배은선 강연 (1) 이 한 장의 사진 대륙학교 14기의 6번째 강연은 철도박물관장 배은선 선생의 “대륙철도의 역사와 의의”였다. 한국철도의 역사와 대륙철도 연결의 의미를 살피는 시간이었다. 이 강연은 세 가지 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1) 한국철도는 자발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려주었고, (2) 철도의 관점에서 한국은 이미 대륙국가임을 환기시켜 주었다. 그리고 (3) 초기 한국철도는 비록 일본의 한반도와 대륙 침략 목적으로 부설되었지만, 한민족이 철도 건설의 자발성과 대륙성을 회복하면 남북한의 공존과 번영의 수단이 될 것임을 인식시켜주었다. 배은선 선생의 강연은 한국철도의 시작을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됐다. 이 사진의 존재는 일찍부터 알려졌으나, 그 역사적 의미는 최근 배은선 선생에 의해 제대로 해석되었다. 이 사진은 1897년 3월.. [中南米巡回公演] 11.プエルトリコ公演(2) 大学劇場 崔承喜のプエルトリコ公演が開かれた劇場はプエルトリコ大学劇場だった。 この劇場について少し混乱があった。 1940年3月13日の「ラ·トーレ」の記事には劇場情報がなく、4月17日の「ラ·トーレ」の記事には「新しい講堂で(en el Nuevo Auditorium)」とだけ書かれていた。 この「講堂」を調べてみると、今のを指す言葉だった。 プエルトリコ大学の教授と学生たちはこの劇場を「講堂」と呼んだようだ。 が大学新聞だったことを考慮すれば、十分あり得ることだった。 プエルトリコ大学劇場は当時はもちろん、今日の基準でも立派な建築物だった。 客席が2,085席で、冷房装置を備えた大型舞台と大学ロゴを刻んだ最高級幕を備えた。 パイプオルガンが設置され、絵を展示する回廊と館内売店、2つのチケット売り場を備えた本格大型劇場だった。 この劇場が発行した最近の案内文を見ると、これまでこの劇場は「学.. 이전 1 ··· 37 38 39 40 41 42 43 ··· 6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