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90) 썸네일형 리스트형 [대륙17학교] 42. 박환 강연-외전 (5) 커피전문점 카카듀 박환 선생의 강연을 들으면서 많은 질문거리가 떠올랐지만, 내가 손들고 한 질문은 하나였다. 지리멸렬하던 상하이 임시정부가 김구가 국무령(1926)-주석(1927)으로 취임하면서 재건하기 시작했을 때 조선내 연통제를 복구하려는 시도가 있었는가, 였다. 박환 선생은 “뭐든 해보려고 했을 것”이라고는 답변하셨지만, 적어도 문헌으로 나타난 것은 없는 것같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김구 주석은 북중국과 만주의 동포들과 미주 동포들에게 지속적으로 자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던 것을 보면, 국내 연통제 복구는 시도했더라도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1926-1932년 사이의 임시정부 재건과 국내 연락조직 복구 문제를 연결시켜보고 싶었던 것은 “커피전문점 카카듀” 때문이었다. 카카듀는 “조선인이 개업한 최초의 커피전문점”으로.. [대륙17학교] 41. 박환 강연 (4) 상하이 임시정부의 좌우합작 박환 선생의 강연을 통해서 새삼 알게 된 것은 두 가지였다. (1) 대한민국을 민주공화제로 정초했다는 점과 (2) 1919년 9월11일 통합임시정부 수립이 완수되었을 당시에는 좌우합작으로 수립된 정부였다는 점이었다. (1) 민주공화국으로서의 ‘주권재민’을 명시한 임시정부의 헌법은 앞에서 이미 살펴봤지만, 이처럼 주권재민을 헌법에 명시한 나라가 1919년 4월 현재 국제적으로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즉, 민주공화제라는 용어를 헌법에 명기한 나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처음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해 한양대 사학과의 박찬승 교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발간한 역사 교양서 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주공화제라는 용어를 헌법에 명기한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사실상 처음이에요. 19.. [대륙17학교] 40. 박환 강연 (3) 상하이 임시정부의 헌법 상하이 임시정부의 첫 번째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1919.4.11.)”을 기초한 사람은 조소앙이었다.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도 역시 그의 작품이었다. 1919년 3월11일 중국 지린에서 대한독립의군부 주도 아래 독립 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 역시 조소앙이 작성하였다. 그는 이미 두 선언에서 조선 민족의 주권은 소멸하거나 다른 민족에게 양도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대한민주의 자립’을 선포한 바 있었다. 3 · 1 운동이 확산되자 조소앙은 지린에서 상하이로 건너가 헌법을 기초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조소앙은 임시정부 설립의 정당성을 조선인이 직접 행동으로 주권을 행사한 3 · 1 운동에서 찾았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명시한 ‘헌법’인 “임시헌장”을 내놓았다. 전.. [대륙17학교] 39. 박환 강연 (2)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미주 의 무형정부(1912.11.), 연해주 의 대한광복군정부(1914), 베이징 의 민족대동회의(1917.7.),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1919.2.) 등은 모두 삼일만세운동(1919.3.)의 전에 시도된 임시정부들이었다. 대한제국이 망하고 난 직후부터 독립의 열의는 뜨거웠고,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정부에 대한 욕구가 치솟고 있었다는 말이다. 삼일만세운동이 시작되자 이같은 열의와 욕구는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삼일운동은 3월1일에 시작되었으나 적어도 두 달 이상 계속되었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하거나 임시정부를 제안하는 전단들이 뿌려지곤 했다. 1919년 3월3일 발행된 은 곧 임시정부가 조직되고 임시 대통령을 선거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은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발행되던 지하신문으로 .. [대륙14학교] 38. 박환 강연 (1) 임시정부 전사 대륙학교 14기의 7번째 강연은 박환 선생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임시정부의 성립과 운용, 변천과정, 이동경로 등을 살피면서, 현재의 대한민국과의 연관성과 의미를 확인하는 강연이었다고 이해된다. 흔히 임시정부라고 하면 ‘삼일운동’과 ‘상하이 임시정부’가 떠오르게 되는 것이 ‘상식’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임시정부 구성 노력이 있었고, 일부는 발족까지 되었었다. (1) 미주 : 최초의 임시정부 논의는 일제 강점이 시작되기 직전 1909년 7월6일에 시작됐다. 미국의 한인교포들의 단체인 의 기관지 가 “현정부가 일본에 투항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은즉,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천명한 바 있었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10년 9월21.. [대륙14학교] 37. 배은선 강연-외전 (5) 최승희와 대륙횡단철도 대륙횡단철도라면 우리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떠올린다. 남북철도를 다시 연결하려는 노력은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해 물류를 원활하게 하려는 관심 때문인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실제로 남북철도 복원 사업도 진행되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손기정 선생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했었기 때문이다. 1936년 6월4일의 는 손기정, 남승룡을 포함한 일본육상 대표단 선발대가 6월3일 오후3시10분에 경성역에 도착했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도쿄에서 출발한 것은 6월1일 저녁이었을 것이다. 이는 최승희가 경성공연을 위해 여행했던 경로와 같다. 손기정과 남승룡 선생이 경성에 도착했을 때,.. [대륙14학교] 36. 배은선 강연-외전 (4) 최승희와 경의선과 경원선, 그리고 만철 최승희는 1937년을 분주하게 보냈다. 이 해에 금강산을 소재로 한 무용영화 를 제작했고, 미주와 유럽 순회공연이 계약되어 연말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순회공연을 위해서 준비할 것이 많았다. 순회 공연에서 발표할 작품들을 창작하고,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 각지의 팬들에게 해외순회공연을 알리기 위한 고별 공연도 해야 했다. 고별공연은 팬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공연을 하고 떠나려는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도구(渡歐)고별공연”이라는 이름으로 단행된 이 순회공연은, 3년 동안 해외공연을 해야 하니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 공연이자 ‘성원을 부탁한다’는 당부의 공연이었다. 첫 번째 고별공연은 일본에서였다. 도쿄에서 가까운 순서로 나고야(1937/1/20-26), 교토(1/27-2/.. [대륙14학교] 35. 배은선 강연-외전 (3) 최승희와 경부선 1926년 3월25일 최승희는 경성역에서 10시 정각에 출발하는 경부선 상행8호 급행열차 2등석에 올라 도쿄 유학길에 올랐다. 자신을 신입단원으로 받아준 이시이 바쿠 무용단과 함께였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으므로 도쿄로 가는 열차가 상행선, 도쿄에서 멀어지는 열차가 하행선이었다. 경성과 인천 공연을 마친 이시이 무용단은 도쿄로 돌아가는 길에 대구와 부산에서도 공연을 가졌으므로, 최승희의 첫 도쿄행 기차여행은 조선에서 2차례나 단속되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경부선(경성-부산), 부관연락선(부산-시모노세키), 산요본선(시모노세키-고베), 도카이도본선(고베-도쿄)의 철도를 이용하는 긴 여행이었다. 일본의 첫 철도는 1872년 9월12일 수도 도쿄의 신바시(新橋)에서 항구도시 요코하마의 사쿠라기초(桜木町)을 연결하는.. 이전 1 ··· 36 37 38 39 40 41 42 ··· 6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