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90) 썸네일형 리스트형 [도호쿠2023취재] 24. 센다이 (2) 다테 마사무네 미야기현(宮城縣)의 현도 센다이(仙台)는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1567-1636)의 도시계획으로 시작된 도시입니다. 다테 마사무네는 일본 전국시대(1467-1573) 우슈(羽州)와 무쓰(奧州) 지역을 지배한 다이묘(大名)로, 다테 가문의 17대 당주이자 에도시대(1603-1868)에 센다이번의 초대 번주였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죽은 후, 임진왜란에서 패퇴한 일본 각지의 다이묘들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자 지명을 둘러싸고 두 패로 나뉘어 대립했습니다.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모리 데루모토의 서군이 기후현 세키가하라에서 전투를 벌이는 동안, 도호쿠 지역에서도 동군에 가담한 다테 마사무네가 모가미 요시아키와 함께 서군에 가담한 우에스기 가게카츠를 패퇴시켰.. [도호쿠2023취재] 23. 센다이 (1) 일찍 문 닫아요. 아오모리 도서관에 헛걸음을 한 것은 그나마 참을 만 했습니다. 모리오카 취재가 지나치게 잘되었던 데다가, 그 덕분에 기분도 업(up)되고 내친 김에 일정을 앞당겨서 아오모리에 갔다가 허탕을 친 것이니까요. 결국 일정을 당기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늦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센다이(仙台)는 경우가 다릅니다. 미야기 도서관은 센다이 역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버스 간격이 뜨문뜨문 합니다. 버스를 하나 놓치면 40분씩 기다려야 합니다. 아침 일찍 모리오카를 출발, 센다이 역에는 제시간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버스 정류장이 하도 넓어서 승차장 찾다가 버스를 한 대 놓친 겁니다. 네, 미야기현은 전철도 있긴 한데 버스 의존도가 높은가 봅니다. 버스 승강장이 16개도 넘는데다가, 각 승강장에 서는 버스.. [도호쿠2023취재] 22. 아오모리 (8)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 그리고 이시이 다쿠보쿠 일본 문학평론가들 중에는 이시이 다쿠보쿠의 시가 일제의 조선 강점을 비판하거나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에 동조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대체로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했을 때 다쿠보쿠가 때 추모시를 발표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는 1909년 10월29일의 에 “백회통신”이라는 제목으로 이토에 대한 애도의 글을 쓰고, 5수의 단가를 지어 경의를 표했습니다. 또 그해 11월5일 에도 “11월4일의 노래 9수”라는 제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노래를 실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한 다쿠보쿠가 동시에 그 저격자 안중근에게 동조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더구나 일제의 조선병합은 이토 히로부미의 최대 업적인데, 그의 사망을 애도했던 다쿠보쿠가 이를 비판했을 리 없다.. [도호쿠2023취재] 21. 아오모리 (7) 이시카와 다쿠보쿠 아오모리 현에도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 1886-1912)의 흔적이 많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고향 모리오카 현에 인접해 있는데다가, 자주 홋카이도를 유랑했던 다쿠보쿠는 아오모리를 지나다니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에게 있어서 아오모리는 그냥 지나치는 경유지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리던 다쿠보쿠가 자주 바다로 나가 마음을 달랬던 곳이 아오모리의 해변이었습니다. 그의 시집 의 첫 시 “나를 좋아하는 노래(我を愛する歌)”의 첫 연에는 “동해의 작은 섬”이 등장합니다. “동해의 작은 섬 갯바위의 백사장에/ 나는 눈물에 젖어/ 게와 장난을 한다.” (東海の小島の磯の白砂に/ われ泣きぬれて/ 蟹とたはむる.) 이 동해의 작은 섬은 홋카이도 하코다테의 오모리하.. [도호쿠2023취재] 20. 아오모리 (6) 하치노헤 공연 최승희 선생은 1937년 6월26일 아오모리 현의 제2의 도시 하치노헤(八戶)에서 공연을 가졌습니다. 공연장은 하치노헤시의 니시키자(錦座)였습니다. 이 공연은 1937년의 행사를 기록한 이 확인해 줍니다. 하치노헤 지역은 선사시대 이래 사람이 살았다고 하지만, 이 지역을 ‘하치노헤’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도쿠가와 막부가 난부씨(南部氏) 일족을 위해 ‘하치노헤 번’을 ‘모리오카 번’에서 분리시켰던 시기였습니다. 난부씨 일족은 이 지역에 많은 요새화된 정착촌과 말 사육장을 설립했는데, 헤(戶)는 그 같은 말 사육을 겸한 요새 정착촌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오모리 현에서 이와테 현의 북부에 이르기까지 ‘헤’라는 말이 붙은 지명이 다수 존재합니다. 이치노헤(一戶)는 오늘날 이와테현의.. [도호쿠2023취재] 19. 아오모리 (5) 히로사키 공연 1936년 11월23일에는 최승희 무용단의 히로사키(弘前) 공연이 있었습니다. 전날의 아오모리 공연에 이어 제자 히라사와 키요코(平澤喜代子)를 데뷔시키는 두 번째 공연이었지요. 아오모리는 키요코의 고향이고, 히로사키는 키요코가 여학교를 다니던 곳입니다. 히라사와 키요코의 연고가 있던 두 도시에서 데뷔 공연을 열어준 것이니, 당시 최승희가 제자 히라사와 키요코를 얼마나 배려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서둘러서 히라사와 키요코를 데뷔시켰는지 궁금합니다. 제자로 훈련시키기 시작한 지 반년 만에 고향 무대에 서게 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겁니다. 자신도 1년 반이 걸렸던 마당에, 아무리 뛰어난 제자라고 해도 반 년 만에 무용 작품을 공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 [도호쿠2023취재] 18. 아오모리 (4) 히라사와 키요코 1936년 5월3일 아오모리 공연을 가졌던 최승희는 11월22일 다시 한 번 아오모리 시를 방문, 가부키자에서 공연을 가졌습니다. 무용가가 공연하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도쿄나 오사카처럼 대도시가 아니라면, 아오모리 같은 중소도시에서 한 해에 두 번의 공연을 갖는 것이 일반적인 일은 아닙니다. 관객이 현저하게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과연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최승희에게는 히라사와 키요코(平澤喜代子)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최승희의 5월3일 아오모리 공연을 보고 최승희 문하에 입문한 학생입니다. 히로사키(弘前)의 와요재봉여학교(和洋裁縫女学校)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최승희를 따라 도쿄로 올라왔고, 최승희무용연구소의 입소해 제자가 됐습니다. 재능과 노력 덕분에 빠르게 성장한 히라사와 키요코는 반년 만인 193.. [도호쿠2023취재] 17. 아오모리 (3) 토오(東奧)연감 아오모리 도서관에서 4회의 공연을 비교적 손쉽게 확인한 것은 두 권의 연감(年鑑) 덕분입니다. 이 연감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신문 조사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을 텐데, 그랬다면 이와테 도서관에서 확인된 1936년 5월1일 모리오카 공연에 뒤이은 5월3일의 아오모리 공연을 확인하는 데에 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서 한 분이 1936년과 1937년의 주요 사건들을 기록한 을 찾아내셨고, 이 연감의 “무용”란에 해당 연도의 주요 무용공연들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은 아오모리 현에서 발행되는 조간단독의 지방신문 가 발행하는 연감입니다. 1936년의 에는 1936년 5월3일에 최승희의 아오모리 가부키자 공연, 그해 11월22일에도 아오모리 가부키자와 11월23일 히로사키의 히로사키자(弘前座)에서 열.. 이전 1 ··· 33 34 35 36 37 38 39 ··· 6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