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학교 14기의 7번째 강연은 박환 선생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임시정부의 성립과 운용, 변천과정, 이동경로 등을 살피면서, 현재의 대한민국과의 연관성과 의미를 확인하는 강연이었다고 이해된다.
흔히 임시정부라고 하면 ‘삼일운동’과 ‘상하이 임시정부’가 떠오르게 되는 것이 ‘상식’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임시정부 구성 노력이 있었고, 일부는 발족까지 되었었다.
(1) 미주 <무형정부>: 최초의 임시정부 논의는 일제 강점이 시작되기 직전 1909년 7월6일에 시작됐다. 미국의 한인교포들의 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가 “현정부가 일본에 투항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은즉,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천명한 바 있었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10년 9월21일의 <신한민보>는 “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에 상당하는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고, 10월5일의 신문에서는 "대한인의 자치기관"이란 제목의 논설을 통해 <대한인국민회>가 자치 능력을 길러서 앞으로 임시정부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구상을 밝혔다.
<신한민보>의 주필 박용만은 1911년 “무형국가론”을 주장하면서, “외국에 나온 조선 민족을 무형한 국가와 무형한 정부 산하로 통합하여 헌법을 마련하고 정치적 구역을 나누어 행정기관을 마련하고 개개인에게 의무와 권리를 부여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또 무형국가를 이끄는 무형정부, 즉 임시정부의 역할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부가 맡아야 한다고 보았다.
박용만의 무형국가론을 지지하는 여론이 확산하는 가운데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스스로 해외 한인을 대표하는 무형의 정부임을 천명했다. 하지만 <대한인국민회>는 러시아와 중국, 일본에 체재하는 조선인 동포들을 포괄하는 임시정부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2) 연해주 <대한광복군정부>: 연해주의 한인들도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시작했다. 1911년 12월 연해주의 한인 결사체로 결성된 <권업회>는 우선 무장투쟁을 위해 광복군을 양성하는 한편, 광복군을 지휘하기 위한 장교 양성을 위해 <대전학교(大甸學校)(1913)>를 설립, 운영했다.
권업회는 러시아의 극동총독과 교섭해 광복군 군영지를 조차하는 한편, 광복군 양성을 위한 비밀결사로 양군호(養軍號)와 해도호(海島號)를 운영했다.
결과적으로 1914년 권업회 의사부의 신임의장 이상설(李相卨)의 지휘 아래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시베리아 전역에 훈련받은 무장병력 약 3만여명의 광복군을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권업회는 이를 독립의 기회로 인식했다. 이 해는 러일전쟁 10주년으로 러시아에서는 러일전쟁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고, 대일 개선설이 나돌았다.
또 이 해는 한인이 연해주에 이민한지 50주년이 되는 해여서, 이를 크게 기념하기 위한 기념대회도 준비하고 있었다.
러시아와 한인들의 고조된 분위기를 배경으로 권업회는 시베리아와 만주, 미주에 널리 퍼져있는 무장력을 갖춘 독립운동 단체를 모아 독립전쟁을 수행할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했다.
대한광복군정부 수립은 권업회의 중심인물 이상설과 이동휘, 이종호와 정재관 등이 주도했고, 첫 정부수반으로 이상설(정통령)과 이동휘(부통령)이 피선되었다.
일제군경에 압수당한 독립운동 관계 문서에 의하면, 1914년 당시 이상설 주관하에 있던 시베리아 병력 3만여명을 제외하고도 만주 길림(吉林), 무송현(撫松縣), 왕청현(汪淸縣), 통화(通化)·회인(懷仁)·집안(集安)지역 등에 수만명, 미국에 855명 등의 한인이 훈련을 받고 무장을 갖추었다고 되어있다.
권업회의 대한광복군정부가 수립되자 국외의 모든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1914년 8월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과 공동방위체제를 확립한 러시아 정부에 의해 러시아내 한인의 모든 정치, 사회활동이 금지되었고, 9월에는 대한광복군정부의 모체가 된 권업회가 해산되면서 더 이상 활동을 못하고 대한광복군 정부도 해체되었다.
(3) 중국의 <신한혁명당>과 <민족대동회의>: 중국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을 독립 기회로 보고 임시정부 수립이 준비됐다. 1915년 3월 베이징에서 신한혁명당이 결성되었다.
신한혁명당은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 중국과 함께 일본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이때 일본 공격에 동참하여 독립의 기회를 얻고자 중국 베이징 정부와 밀약을 맺을 계획을 세웠다.
신한혁명당은 베이징 정부와의 교섭 주체로 고종을 상정하고 그를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세우고자 했다. 이에 신한혁명당의 외교부장 성낙형을 국내로 밀파하여 고종에게서 조약 체결에 관한 권한을 위임받고자 했다. 하지만 성낙형이 국내에서 체포되고, 독일이 패하면서 망명정부 수립모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와는 별도로 신규식과 박은식, 신채호와 박용만, 윤세복과 조소앙, 신석우와 한진교 등 14명의 독립운동가가 1917년 7월 재외 한인의 대표기관인 민족대동회의를 열어 공화정 임시정부를 건설하자는 내용의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대동단결선언은 일제의 강점으로 한민족의 주권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주권불멸론”을 바탕으로, 1910년 순종의 주권 포기는 곧 국민에게로의 주권 이양으로 해석했다. 이같은 국민주권설을 바탕으로, 일제가 국토를 강점하고 있으니 해외 거주 동포가 주권을 행사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재외 동포가 민족대회의를 개최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대동단결선언은 국민주권설을 정립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이념을 확립했으며 정부적통할체제를 계획하는 등 1917년까지 다양하던 독립운동의 이론을 결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선언의 계획은 당장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그 문서가 재외 동포 사회에 널리 송달되었으며, <신한민보> 등 각처의 신문을 통해 계몽되면서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4)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연해주에서는 대한독립군정부가 실패한 뒤,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가 다시 준비되었다. 삼일운동 직전인 1919년 2월25일 니콜리스크에서 러시아와 간도, 국내 등에서 모여든 약 130명의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단체 대표회의를 열고,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 결성을 결의했다. 대한국민의회는 삼일운동이 시작된 후 3월17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공식 출범했다.
대한국민의회는 의장에 문창범, 부의장에 김철훈, 서기에 오창환을 선출하였으며, 독립을 선포하고 일제가 불응하면 혈전을 포고하겠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따로 행정부를 조직하여 대통령에 손병희, 부통령에 박영효, 국무총리에 이승만, 탁지총장에 윤현진, 군무총장에 이동휘, 내무총장에 안창호, 산업총장에 남형우, 참모총장에 유동열, 강화대사에 김규식을 추대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베이징 소재 각 국 영사관에 이와 같은 대한국민의회의 성립을 통보하자 미국·프랑스 영사는 동의를 표하였다. 소성 등 각지의 한인들은 독립을 선포하고 경축식을 올렸다. 대한국민의회는 독립군과 군자금을 모집, 모금하고 총기도 구입하여 독립군을 훈련시켰으며, 국내진입전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4월11일 상해에서 결성된 임시정부와 통합할 것을 협의, 5월13일 각지의 한인 의회를 통합할 것을 결의하고, 7월11일 통합 원칙을 마련하자,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는 8월30일 의원 5분의4의 찬성을 얻어 상해의 임시의정원과 통합하기 위해 해산했다. (jc, 202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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