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90) 썸네일형 리스트형 [도호쿠2023취재] 40. 최승희 탄생일 (5) 서만일 5. 서만일의 평전 기록 최승희의 생일이 정병호의 주장과는 달리 1911년 12월24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더라도 아직도 문제는 남아 있었다. 과 영화설명 레코드(1936)의 기록이 최승희의 생년을 1912년이라고 서술했기 때문이다. 이런 기록들이 신문기자나 레코드회사의 편집자의 착오나 실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벨기에와 멕시코 공문서에도 최승희의 생년을 1912년으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초의 평전자 서만일(1957a:68)도 최승희의 생년이 1912년이라고 밝힌바 있었다. 그러나 서만일의 기록은 조금 신중하고 자세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서만일의 최승희 평전 는 시기적으로 최초의 평전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지만, 다른 평전들이 참고하지 못한 일차 자료를 다수 활용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 [도호쿠2023취재] 39. 최승희 탄생일 (4) 또 다른 호적과 여권 기록 4. 또 다른 호적과 여권의 기록 부친 최준현의 호적에 나타난 최승희의 생년월일과 숙명여학교 학적부에 기록된 첫 생년월일이 달랐다는 점이 확인됐지만, 그 이유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 학적부의 생년월일이 호적과 일치되도록 수정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도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 호적과 학적부의 둘 중 하나의 생년월일이 잘못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떠올랐다. 최승희는 자신의 진짜 생일(1911년 12월24일)을 구술했고, 담임선생이 이를 받아 적었지만, 후일 이 생일이 호적상의 생일과 다르다는 점이 발견되자, 호적을 근거로 이를 11월24일로 수정했을 것이라는 것이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이 추론을 확인할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학적부 이후의 다른 공문서 기록을 찾아서 생.. [도호쿠2023취재] 38. 최승희 탄생일 (3) 호적과 학적부 3. 호적과 학적부 정병호가 최승희의 생년과 생월일을 확정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자료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부친 최준현의 호적(1번)과 숙명여학교 학적부(2번)였다. 이 두 초기 문서에는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1911년 11월24일로 기록됐다. 필자는 이 두 자료를 가장 먼저 재검토해 보기로 했다. 부친 최준현의 호적은 서울시 종로구에 보관되어 있었다. 나는 종로구청을 방문해 호적열람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개인정보보호법(2010)이 시행되면서 직계 가족이 아닌 제3자가 타인의 호적을 열람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호적열람의 목적이 연구목적임을 밝히고 최준현은 물론 그 직계 가족들이 모두 사망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호적 열람을 거듭 요청했다. 기록관리사는 대안을 제시했다. 열람이 필요한 사항.. [도호쿠2023취재] 37. 최승희 탄생일 (2) 문제 제기 2. 문제 제기 정병호(1995:23)는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1911년 11월24일이라고 서술했다. 그는 최승희의 부친 최준현의 호적과 숙명여학교의 학적부를 확인한 후 최승희의 생일을 이날로 확정했다. 이후의 모든 평전들은 정병호의 예를 따랐다. 김찬정(2003:22)과 정수웅(2004:15), 박진욱(2007:5)과 배윤희(2011:27), 강준식(2012:20)과 이현준(2019:407) 등이 최승희의 생일을 “1911년 11월24일”이라고 밝혔다. 1998년 9월19일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된 최승희의 묘소에 세워진 묘비의 생년월일도 이 날짜였다. 그러나 정병호 이전의 평전들은 최승희의 생년월일에 대해 일치된 서술을 보이지 않았다. 서만일(1957a:68)은 최승희의 생일을 “1912년 1.. [도호쿠2023취재] 36. 최승희 탄생일 (1) 서론 1. 서론 20세기 말까지 최승희는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었다. 한국에서는 탁월한 현대무용가로 인식되면서도 친일 행적과 월북 예술인이라는 딱지 때문에 유보적인 대접을 받았다. 조선무용을 국가의 대표적 예술양식으로 삼고 있는 북한에서도 최승희를 그 창시자로 치하했지만 생애 마지막에는 체재에 의해 숙청되었다는 의혹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무용으로 스타가 탄생했던 것은 최승희가 처음”이라는 평가를 하면서도(光吉夏弥と尾崎宏次, 1977:7), 1970년대 이후에는 거의 잊혀져 가고 있었다. 최승희가 시작한 조선무용을 공연하는 재일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조차 최승희를 모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경극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무용가로 기록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점점 낯설어지고 있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 [도호쿠2023취재] 35. 고베 세큐분코 (3) 논문 요약 고베 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도 포스팅할 예정이지만, 그 요약을 먼저 마련했습니다. 연구 동기와 과정과 조사 결과, 그리고 추론과 검증의 과정을 읽어보고 싶은 분들은 이어지는 본문을 읽으면 되겠지만, 그게 번거로운 분들은 이 요약본만 보시면 됩니다. 저는 최승희의 생일과 나이를 명시한 22개의 평전과 공적 자료를 검토했습니다. 정병호 선생은 최승희 평전(1995)에서 그의 생년월일을 1911년 11월24일로 확정했고, 이후에 출판된 평전과 연구서들은 모두 이 날짜를 최승희의 탄생일로 기록했습니다. 여기에는 북한 평양 애국열사릉에 마련된 최승희의 묘비(1998)도 포함됩니다. 이 생년월일은 최승희의 부친 최준현의 호적(1911)과 숙명여학교의 학적부(2022)에 근거를 둔 것이지만, 이와 다른 날짜를 최승희.. [도호쿠2023취재] 34. 고베 세큐분코 (2) 논문 발표 이번 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은 “최승희 탄생일”이라는 간단한 제목이었습니다. 논문의 내용도 제목만큼이나 간단합니다. 그동안 널리 알려진 최승희 선생의 생년월일이 잘못되었음을 밝히고, 새로운 생년월일을 밝힌 것이었습니다. 최승희 선생의 생일이 잘못 알려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2017년 유럽 조사를 할 때부터 느꼈습니다. 벨기에 브뤼셀 왕립도서관에서 발굴한 최승희 선생의 노동허가증에 그의 생년이 1911년이 아니라 1912년으로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공문서에 자신이 몇 년에 태어났는지를 잘못 기입하기란 대단히 드문 일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이후 발굴된 최승희 선생의 미국 입국서류, 멕시코 입국비자신청서 등에도 그의 나이가 이상하게 기입되어 있었습니다. .. [도호쿠2023취재] 33. 고베 세큐분코 (1) 청구문고 후쿠시마 조사 결과는 성공적이었지만 동시에 제한적이었습니다. 사전조사에서 확보한 포스터의 공연을 확인한 것은 좋았지만, 후쿠시마에서 있었을 다른 공연을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3-4회의 공연을 발굴해 낼 수 있었던 모리오카와 아오모리에서와는 달리, 센다이와 후쿠시마에서 각각 1회씩의 공연밖에 찾지 못했고, 야마가타에서는 아무 공연도 발굴하지 못했습니다. 즉, 도호쿠의 북부 3개현(아키타, 이와테, 아오모리)의 조사 결과는 훌륭했지만, 남부 3개현(미야기, 야마가타, 후쿠시마)의 취재는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도호쿠에 남아 조사를 계속할 수는 없었습니다. 고베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11월12일(일) 고베시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리는 세큐분코(青丘文庫) 세미나에서 논문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 이전 1 ··· 31 32 33 34 35 36 37 ··· 6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