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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쿠2023취재

[도호쿠2023취재] 34. 고베 세큐분코 (2) 논문 발표

이번 <청구문고> 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은 최승희 탄생일이라는 간단한 제목이었습니다. 논문의 내용도 제목만큼이나 간단합니다. 그동안 널리 알려진 최승희 선생의 생년월일이 잘못되었음을 밝히고, 새로운 생년월일을 밝힌 것이었습니다.

 

최승희 선생의 생일이 잘못 알려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2017년 유럽 조사를 할 때부터 느꼈습니다. 벨기에 브뤼셀 왕립도서관에서 발굴한 최승희 선생의 노동허가증에 그의 생년이 1911년이 아니라 1912년으로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공문서에 자신이 몇 년에 태어났는지를 잘못 기입하기란 대단히 드문 일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이후 발굴된 최승희 선생의 미국 입국서류, 멕시코 입국비자신청서 등에도 그의 나이가 이상하게 기입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이상한 점을 마음에 두고 있다가 수년에 걸쳐서 조금씩 그 이유를 알아냈고, 그 결과를 논문 형태로 작성한 것은 올해 6월이었습니다.

 

 

이 생년월일은 정병호 선생이 처음 밝히셨고, 이후 아무런 이의 없이 인정되어 왔습니다. 이후의 평전들과 연구서들은 정병호 선생이 확정한 날짜를 최승희 선생의 공식 생년월일로 받아들였고, 북한의 최승희 선생 묘비에도 그 날짜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2011년에는 기존의 생년월일에 맞추어 최승희 탄생 100주년행사들이 국제적으로 열렸습니다.

 

따라서 그 날짜가 잘못된 생년월일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아주 세심한 조사가 필요했고, 완전한 확신을 가지게 되지 않으면 섣불리 발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저는 결국 제가 발견한 새로운 생일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발표를 결심한 직후, 발표의 장으로 <청구문고> 월례 세미나를 선택했던 것이지요.

 

 

논문은 완성됐고, 발표날짜도 결정되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청구문고> 세미나는 고베의 시립중앙도서관 4층의 세미나실에서 열리는데, 고베까지 갈 돈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최승희 연구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후암재단 차길진 회장의 재정지원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아무런 부족함 없이 유럽 조사를 마쳤고, 그 결과를 약 원고지 4천매에 달하는 취재기에 담았습니다. 차길진 회장은 이후 한국과 미주 조사도 지원하셨는데, 2018년에 타계하셨습니다.

 

차길진 회장 타계 이후에도 저는 최승희 조사연구를 계속하면서 글을 써왔는데, 그때부터는 제가 개인적으로 취재비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2019년부터 지금까지 진행한 일본 조사의 대부분은 노후자금으로 저금해 둔 돈을 썼는데, 마침내 돈이 바닥난 것이었습니다.

 

 

히다 유이치 선생께 사정을 설명하고, 논문을 보낼 테니 누군가 이를 대신 발표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께서 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요구까지 하는 것은 지나친 것 같아서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재원이 마련되었습니다. 절친 이원영 선생이, 애써 쓴 논문이니 직접 가서 발표하는 게 좋겠다면서, 항공료를 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본에 갈 수 있게 되었는데, 욕심이 났습니다. 어렵게 일본에 가는 김에 오랫동안 벼르던 도호쿠 취재도 하고 싶었습니다.

 

 

고베에서 논문 발표하고 도호쿠 취재까지 단행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 JR패스입니다. 이 패스는 일본내 모든 JR철도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승차권입니다. 신칸센 탑승도 가능하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광범위한 일본 조사를 하려면 꼭 필요한 패스인 것이지요.

 

그러자 절친 박인호 선생이 JR패스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취재를 잘 해서 좋은 글을 쓰라는 조건이었습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고마웠습니다. 최승희 연구만큼은 정부나 기업의 지원 없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원을 받더라도 사적인 지원만 받기로 하고 있습니다.

 

 

이번 고베 발표와 도호쿠 취재는 이원영, 박인호 선생의 재정지원으로 실현되었다는 점을 꼭 밝혀 두고 싶습니다. (jc, 2023/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