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호쿠2023취재

[도호쿠2023취재] 40. 최승희 탄생일 (5) 서만일

5. 서만일의 평전 기록

 

최승희의 생일이 정병호의 주장과는 달리 19111224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더라도 아직도 문제는 남아 있었다. <만슈니치니치신문(1935/11/29:5)><반도의 무희> 영화설명 레코드(1936)의 기록이 최승희의 생년을 1912년이라고 서술했기 때문이다.

 

이런 기록들이 신문기자나 레코드회사의 편집자의 착오나 실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벨기에와 멕시코 공문서에도 최승희의 생년을 1912년으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초의 평전자 서만일(1957a:68)도 최승희의 생년이 1912년이라고 밝힌바 있었다. 그러나 서만일의 기록은 조금 신중하고 자세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서만일의 최승희 평전 <조선을 빛내고저>는 시기적으로 최초의 평전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지만, 다른 평전들이 참고하지 못한 일차 자료를 다수 활용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문헌이다.

 

첫째, 최승희를 직접 인터뷰한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 평전의 일부 내용은 최승희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으로, 때로는 따옴표를 이용한 최승희의 직접 인용도 많았다.

 

둘째, 서만일의 평전은 최승희의 일기와 안막의 공연일지 및 감상문을 참고했다. 특히 최승희의 일기는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문헌이다. 최승희의 일기를 직접 참고하여 저술된 평전은 지금까지도 서만일의 평전이 유일하다. 그러나 이 일기는 이후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셋째, 최승희의 무용을 관람한 평론가들과 대중들의 반응을 광범위하게 수집해서 기술했다는 특징을 가진다. , 서만일 평전은 최승희와 안막, 평론가와 대중의 일차 자료를 풍부하게 활용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평전이다.

 

또 서만일의 평전은 최승희 무용의 본질을 미학적으로 해설한 유일한 평전이었다. 대부분의 다른 평전들은 (1) 최승희가 얼마나 춤을 잘 추었는지, (2) 조선과 일본과 세계의 관객들이 얼마나 경이에 찬 찬사를 보냈는지, 그리고 (3) 그 때문에 조선민족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서술하는 데에 집중하는 경향이고, 무용 작품 자체에 대한 서술은 매우 적다.

 

그러나 서만일은 (4) 그런 일들이 어떻게그리고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최승희가 조선무용의 체계화를 위해 집필한 <조선민족무용기본(1958a, 1958b)>의 내용을 잘 이해했고, 조선무용의 정신적 기반과 함께 그 기본동작들을 자세히 서술했다. 그리고 그런 조선무용의 특징이 어떻게 조선민족의 감수성이 풍부하게 배인 무용 작품들로 창작되었는지도 설명한다.

 

따라서 최승희 조선무용의 대중적 인기를 서술하면서, 그러한 인기는 조선무용의 미학적 본질에 닿아 있다는 점을 평가한 평전은 서만일의 것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인 최승희의 생년월일을 고찰하는 데에도 서만일은 중요한 인물이다.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난 서만일은, 1912년 서울에서 태어난 최승희와 시간과 거리의 양면에서 연배의 차이가 있었지만 1950년대에 두 사람은 매우 가까웠다.

 

서만일은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의 일본 도쿄 니혼대학교의 후배였다. 그는 1938년 니혼대 예술과에 유학했는데, 이는 최승일이 1919년부터 2년간 수학했던 니혼대 미학과의 후신이다.

 

서만일은 1939년 니혼대 조선인 유학생들로 구성된 학생극단 <형상좌>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검거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른 뒤에 니혼대를 중퇴하고 1941년 귀국했다.

 

서만일은 1946<815해방 1주년기념 희곡집(1946, 문화전선사)>김구 삽화라는 제목의 희곡을 발표하면서 북한에서 문필활동을 시작했고, 1947년 평양국립극장에서 일하던 중, 그해 8월에 소련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 고리키 문학대학에서 6년간 수학했다.

 

 

유학 중 서만일은 러시아어로 시집을 출간했고, 세계청년학생축전 조선대표단을 수행하는 재소 유학생에 선발되었다. 서만일은 러시아 여성과 결혼했고, 19538월에 동반 귀국했다.

 

서만일은 모스크바 유학 기간에 적어도 세 번 최승희와 그의 딸 안성희를 만났다. 첫 번째는 1947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열린 제1회 세계청년학생축전이었다. 최승희는 북한의 축전참가 무용단장이었고, 서만일은 북한 축전참가단을 수행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소련 유학생이었다. 안성희는 이 대회에서 민속무용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세계적 무용가와 유학생이라는 지위 차이 때문에 격의는 있었겠으나 두 사람은 이때 처음 안면을 익혔다.

 

194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제2회 세계청년학생축전에도 최승희와 안성희가 참가했고, 서만일도 수행단으로 파견되었다. 세 사람은 이때 구면으로 반갑게 만났을 것이다.

 

 

세 번째 만남은 19506월 한국전쟁 발발 직전 북한이 대규모 예술단을 소련에 파견했을 때였다. 단장은 문화선전상 허정숙이었고 최승희는 무용단장으로 소련 순회공연을 가졌다. 67일부터 시작된 모스크바 공연에 서만일도 당연히 참석했을 것이다. 서만일과 최승희-안성희 모녀는 이렇게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적어도 3번 해외에서 만나 인연을 맺었다.

 

서만일이 모스크바 유학을 끝내고 19538월에 귀국하자, 이번에는 안성희가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1953년부터 1957년까지 모스크바의 볼쇼이 발레학교에 유학했다. 따라서 서만일과 안성희는, 시기는 겹치지 않았지만, 모스크바 유학생이라는 공통점도 갖게 되었다.

 

귀국 후 서만일은 조선작가동맹 외국문학분과 위원장을 거쳐 부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시, 희곡, 시나리오, 평론, 번역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필력을 과시했다. 그의 인맥으로는 문화부 부상(=차관)으로 근무하던 안막, 조선문학가총동맹 위원장과 문화상(=장관)을 지냈던 한설야와도 가까웠다. 한설야와 서만일은 국제대회에 조선대표로 참석하거나 조선을 방문한 외국작가를 영접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세계 각국의 지식인들과도 폭넓은 교우관계를 맺었다.

 

 

서만일은 한국전쟁 이후 195310월에 창간된 북한 문예지 <조선문학>의 편집위원을 5년간 역임했고, 19569월에 창간된 예술잡지 <조선예술>의 편집위원을 2년 역임했다. 서만일이 <조선예술> 편집위원이던 기간에 최승희도 <조선예술>의 편집위원이었다. 개인적 친분뿐 아니라 업무적으로도 가까웠다는 말이다.

 

서만일은 19589월 안막, 한설야와 함께 숙청되었다. <조선예술>의 편집위원진은 와해되어 서만일과 최승희의 이름이 동시에 사라졌다. 하방 조치를 받은 것은 최승일과 그 자녀들도 마찬가지여서 최로사와 최효섭도 서만일과 함께 숙청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1938년 최승일의 니혼대 예술과 후배로 시작된 양가의 인연은 19589월의 숙청으로 20년만에 끝이 났다. 1995년 최승희와 한설야는 복권되었지만 서만일은 복권되지 못했다.

 

 

서만일이 <조선예술>에 최승희 평전 <조선을 빛내고저>를 연재한 것은 195710월부터 19583월까지이므로, 이들이 숙청되기 1년 전부터 6개월 전까지였다. 이때야 말로 두 사람이 가장 가깝게 지내던 시기였다.

 

6개월간 최승희 평전을 연재하면서 서만일은 자유롭게 최승희와 만나거나 소통할 수 있었을 것이고, 최승희도 서만일의 인터뷰 요청이라면 언제든지 기꺼이 응했을 것이다.

 

그래서 최승희의 생일이 언제였는지 정도의 간단한 정보라면, 직접 만나지 않고도 전화 통화로 간단히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니혼대 예술과 선배인 최승일, 혹은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두 번이나 만났고, 모스크바 유학 후배인 안성희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직접 혹은 간접 인터뷰가 손쉽게 가능했었을 시점에 쓰인 글에서 서만일은 최승희의 생일이 19121224일이라고 서술했다. 이는 최승희 자신의 답변, 혹은 최승희 가족의 답변을 반영한 날짜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예컨대 서만일은 최승희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았을 가능성이 크고, 그 자리에서 생년과 생월일을 전해 들었을 가능성도 높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