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호쿠2023취재

[도호쿠2023취재] 36. 최승희 탄생일 (1) 서론

1. 서론

20세기 말까지 최승희는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었다. 한국에서는 탁월한 현대무용가로 인식되면서도 친일 행적과 월북 예술인이라는 딱지 때문에 유보적인 대접을 받았다. 조선무용을 국가의 대표적 예술양식으로 삼고 있는 북한에서도 최승희를 그 창시자로 치하했지만 생애 마지막에는 체재에 의해 숙청되었다는 의혹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무용으로 스타가 탄생했던 것은 최승희가 처음이라는 평가를 하면서도(光吉夏弥尾崎宏次, 1977:7), 1970년대 이후에는 거의 잊혀져 가고 있었다. 최승희가 시작한 조선무용을 공연하는 재일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조차 최승희를 모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경극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무용가로 기록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점점 낯설어지고 있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특히 2011년 남북한과 중국, 일본에서 대대적인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그에 대한 관심이 부활됐다. 남북한에서 기념식이 열렸고, 일본에서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고, 중국에서도 학술회의가 열렸다. 이 모든 행사는 최승희의 탄생 1백주년으로 알려진 20111124일에 맞추어 진행됐다.

 

필자는 뒤늦게 2017년에야 최승희 연구를 시작했지만, 19111124일이 최승희의 정확한 생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가졌다. 최승희의 유럽 순회공연 조사를 시작으로 미주와 일본의 공연을 조사하면서 생년월일이 다르게 기록된 자료를 다수 발굴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이야기할 때마다 일축 당하곤 했다. 최승희의 호적과 학적부 등의 공식 문서에 명확한 기록이 있고, 북한의 평양근교 애국열사릉에 이장된 최승희의 묘비에도 그 날짜가 생일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 이 문제를 덮어두기는 했지만, 미심쩍은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그것은 필자가 가진 리서치의 기본 원칙을 거스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평가와 해석에 경도되지 않으면서 객관적 사실을 발굴하자는 것이 필자의 목표였다.

 

 

사실의 조사를 위해 나는 프랑스식의 7하원칙을 따르고 있다. ,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의 일곱 가지 질문에 답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중에서도 언제어디서는 시기적, 지리적 배경을 확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항상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한국에서는 최승희의 출생지에 대한 이론도 있기 때문에, 출생시기에까지 의문이 제기된다면, 이는 최승희 연구 전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 우려됐다. 불과 1백여 년 전의 인물에 대한 연구가 그의 출생지와 생년월일조차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다면, 그 밖의 다른 사항에 대한 논의가 정확할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기존의 문헌과 새로 발굴된 문헌 자료를 검토해 최승희의 생년월일을 밝혀내기로 결정했다. 이 글의 주장은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두 문서에 의해 잘못 알려졌다는 것이다.

 

 

, 최승희 부친의 호적과 숙명여학교의 학적부에 기록된 19111124일이라는 생년월일은 오류이며, 이 오류는 최승희가 결혼하면서 새로 입적된 안필승의 호적에는 19111224일로 정정되었다. 이렇게 정정된 생년월일은 최승희의 여권 기록에서도 확인됐다.

 

그런데 이렇게 정정된 생년월일조차 정확한 정보가 아닐 수 있다는 증거가 더 있었다. 결국 안막의 호적과 여권에 기록된 날짜는 음력날짜였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를 양력날짜로 환산하면 1912211일이다. 이것이 그레고리력으로 표현한 최승희의 정확한 생년월일이다.

 

이 글을 통해 새로 확정된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기존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는 한편, 향후의 최승희 탄생과 관련된 각종 행사에 올바로 적용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