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행은 동대문에서 아침 8시반에 모여 9시쯤 출발했는데, 광주를 거쳐 봉강리에 도착하니 저녁 6시반이었다. 10시간의 버스 여정이다. 서울-광주-보성의 거리가 370킬로미터가 살짝 넘으니까 운전 시간만 대략 6시간쯤 걸리는 거리이다.
말수가 적은 원종희 선생의 편안한 운전은 별로 티가 나지 않는 발군이었다. 뒷좌석에서 벌어지는 일에 눈조차 돌리지 않고, 커튼이나 치세요, 하는 식이다. 덕분에 버스 안에서 하지 말라는 일에 과감히 휘말릴 수 있었는데, 이게 몇 십 년 만인지 가물가물하다. 이러고 나면 버스에 찐한 냄새가 남게 마련인데, 원종희 선생은, 나중에 빼죠, 할 뿐이다. 뭔가 말이 더 이어지려나, 하고 잠시 기다려보는데 그뿐이다. 서로 한마디라도 더하려는 은하수에서는 참 드문 일이다.
고속버스라면 휴게소에 두 번 들르고도 6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인데, 8시간이나 걸린 것은 휴게소에 자주 들렀기 때문이다. 너덧 번은 쉬었고, 한 번 쉴 때마다 2-30분씩 시간을 주니까, 마치 휴게소 탐방이 중요 일정으로 포함된 느낌이었다.
은하수 내 흡연율이 꽤 높다는 점은 여러 차례의 아미원 모임과 태안 원족을 통해 잘 알고 있었는데, 잦은 휴식은 흡연자들을 위한 배려였던 것 같다. 비싼 세금을 내면서도 거의 범죄자 대접을 받는 대한민국의 흡연자로서, 이런 따뜻한 배려는 삼년 가뭄에 단비 같은 느낌이 아닐 수 없다.
봉강리 회소헌에 도착, 짐을 일부 내리자마자 일행은 저녁식사를 위해 회천읍내로 갔다. 미리 예약해 놓은 횟집 갯마을은 8시에 문을 닫는다고 했는데, 정해열 선생의 간곡한 부탁으로 무려 20분의 시간을 더 하사받았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럭 세꼬시와 세발낙지, 그리고 갖은 나물 반찬으로 저녁 식사를 했는데, 카스와 참이슬 못지않게 “초암산 맑은 물로 빚”었다는 <다향> 생막걸리의 역할도 컸다.
봉강리 식구들께서 다 오셔서 환영해 주신 게 고마웠다. 식사 전에 “빤짝빤짝”으로 주의를 정돈한 다음, 서로 인사말을 나누었는데,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것도 아닌데 위로 하는 사람과 위로 받는 사람이 뒤바뀐 것 같은 묘한 느낌이었다.
정해열 선생의 형님 정해웅 선생의 집이 방문단의 베이스캠프가 되었는데, 이 집에는 현관 위에 <회소헌(懷笑軒)>이라는 글이 씌여 있었다. “웃음을 품은 집”이라는 뜻이겠는데, 해방 이후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에 의해 50여명의 가족이 체포, 8명이 사망, 8명이 투옥되었던 집안에 깃들기를 바라는 웃음은 어떤 웃음일는지 생각에 잠기게 했다.
아버님 정종회 선생은 1951년에 입산하셨다가 눈에 부상을 입고 동지들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오셨다고 한다. 이후 시각장애인으로 평생을 사셨는데, 보다가 보지 못하는 답답함과 억울함이 얼마나 깊었을지 헤아리기 힘들다. 또 빨치산으로 일림산에서 장기수로 서대문 감옥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의 질곡을 정중앙으로 돌파하시면서 품었던 희망과 좌절과 인내의 세월을 누가 제대로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시각장애인인 전직 빨치산에게 시집오신 어머님 윤점순 여사의 고난어린 삶이 <비정의 시대(2021)>에 기록되어 있다. 감옥에 갇힌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면서 홀어머니처럼 정효항-정해웅-정숙항-정해열-정진항의 5남매를 보란 듯이 키우고 가르치셨던 것은 거의 기적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 책에는 윤점순 여사에게 드려진 광주동명여자중학교의 표창장이 실려 있다.
“표창장. 윤점순. 위 어머니는 어려운 환경과 온갖 역경 속에서도 굳은 신념으로 어린 자녀 5남매의 교육은 물론 알찬 가정 육성에 분투노력하여 오늘의 밝은 등불이 되었기에 장한 어머니로서 표창합니다. 1970년 5월8일.”
“밝은 등불”이라는 말에 오래 생각에 머문다.
회소헌의 현관을 들어서면 왼쪽 벽, 작은 방과 주방 사이에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이 집을 짓고 나서 1988년 아버님 정종희 선생께서 출옥하신 직후에 다 같이 모여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이때의 웃음이 바로 “회소헌” 웃음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윤점순 여사의 “밝은 등불”은 회소헌에 따뜻한 웃음을 피우기 위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jc, 2025/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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