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정의 4백50년 역사를 살피는 데에 하루가 꼬박 걸렸다. 이 고택이 지금의 모습으로 유전된 경과를 추적하려면 문헌으로 뒷받침되는 정확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북정의 정원 이야기는 개인 감상을 마음껏 늘어놓을 수 있겠다.
봉강 정해룡 선생의 생가 거북정을 체험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 두 개다. 하나는 내외담이고 다른 하나가 안사랑채의 정원이다. 내외담은 안채에 거주하면서 일하는 여성들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한 돌담이다. 내외담은 거북정 전체를 둘러싼 돌담의 연속선이면서도 안채와 사랑채를 가르는 경계 역할도 한다. 실제로 내외담의 외관은 외담의 모습과 비슷하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또 하나의 독립공간이 안사랑채의 정원이다. 나는 거북정 외벽에 쓰인 “거북정”이라는 말을 처음 읽었을 때 이것이 “집(亭)”이 아니라 “정원(庭)”을 가리키는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외벽의 글씨가 안사랑채 정원의 외벽에 씌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정원을 보자마자 매료됐다. 정해열 선생이 숙소를 배정하면서 배려의 뜻으로 펜션에서 자라고 했을 때, 말은 못했지만 실망했다. 이곳의 새벽 풍경이 머리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무언의 실망이 읽혔는지는 몰라도 정해열 선생은 다음날 내 숙소를 이곳으로 옮겨주었다.
2박3일의 짧은 기간이지만 나는 이 정원을 4차례나 찬찬히 즐길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두러 이곳에 왔을 때였고, 두 번째는 그날 밤 숙소로 가기 전에 밤의 정원을 잠깐 구경했다. 다음날 벌교로 출발하기 전에도 안사랑채 마루에 앉아서 이 정원을 바라보았고, 셋째날 새벽에는 아침6시경부터 두 시간 동안 이 정원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정원의 연못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맞는 말이다. 이 정원에 한반도 모양의 연못을 판 정해룡 선생의 뜻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대문 옆에 세워진 “우국지사 봉강 정해룡”이라는 기념비의 제목과 그 뜻이 통하는 연못이다.
조석으로 나라를 걱정하던 정해룡 선생의 뜻과는 별도로, 나는 이 연못의 조형미에 놀랐다. 한반도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세한 고려와 잔손질이 필요했을 터인데, 지금은 전혀 인위적인 억지를 발견할 수 없다. 인공 연못인데 너무도 자연스럽다.
나는 잦은 일본 취재 때문에 일본식 정원을 꽤 관람한 편이다.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공원과 최근에 조성된 사적 정원을 가리지 않고, 일본식 정원은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이 지속적으로 남아 있다. 앙증맞도록 귀여운 분재들도 빠지지 않는 단골 요소이다.
거북정에는 매니큐어된 분재가 없다. 모든 나무와 풀은 사람이 옮겨 심은 것일 텐데도 지금은 사람의 손길 흔적이 사라지고,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완전히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새벽에 이 정원을 몇 바퀴나 걸어 돌았지만, 눈길이 가는 곳마다 새로운 느낌을 주는 것도 그때문일 것이다. 발길의 방향과 각도뿐 아니라 시선의 방향과 각도가 주는 변화가 얼마나 다양한지 모르겠다. 아무리 보고 아무리 거닐어도 질리거나 지루해지지 않는다.
이 정원에서 자라 올라간 소나무 한그루가 특히 눈에 띤다. 마루에서 보면 왼쪽담 중간쯤에서 자란 이 소나무는 잠시 담장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안쪽으로 휘어들어온 다음 10미터도 넘게 자랐다. 이 정도로 큰 나무는 정원에서 하나뿐이기 때문에 눈길을 잡아끌지 않을 수가 없다.
정원 밖에서 보아도 이 소나무는 그 위엄과 곡선미를 자랑한다. 거북정 전체가 수평적으로 배열된 차분한 느낌이라면, 이 소나무 한그루가 수직의 역동성으로 균형을 잡고 있다. 게다가 그 수직성은 그냥 직선이 아니라 크게 휘어 올라간 곡선적인 수직성이어서 역설적이다.
이 정원에는 쪽문이 두 개다. 하나는 안채로 들어가고, 다른 하나는 바깥사랑채로 나간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의 발길이 닿을 수 있다는 뜻이고, 남녀노소와 주객,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즐길 수 있는 정원이라는 뜻이다.
이 정원을 만든 정해룡 선생은 근대적 예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분이다. 그러나 이 정원을 보면 정해룡 선생이 예술가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거북정의 정원은 우국지사이자 조형예술가 정해룡 선생의 대표작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jc, 2025/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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