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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2025보성

[은하수2025보성] 2. 망월 구묘역

올해 은하수 정기 소풍이 정해진 것은 두 달쯤 전이었다. 지도부가 아미원에서 준비회의를 열었는데, 나는 테이블 위에 널린 그릇을 치우러 아미원에 갔다가 엿듣게 되었다.

 

정해열 선생의 제안으로 목적지는 전남 보성으로 정해졌는데, 행주질을 하던 나는, ‘보성군이면 벌교도 가면 좋겠네하는 소망을 품었다. 그 소망을 입 밖에 내지 못했지만, 방문지에 태백산맥문학관도 포함되는 바람에 결국 벌교도 가게 됐다. 나는 바로 소풍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차편과 식사, 답사와 강연 등의 일정도 의논되었겠는데, 세부사항은 지도부가 잘 알아서 결정하실 것이니 내가 이렇쿵저렇쿵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중에 결정된 것을 보니까 광주 망월의 국립묘역 참배도 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과연 은하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망월 묘역 참배가 네 번째다. 2018년에 처음 갔던 이래, 2022년에는 나주의 홍양현 선생과 함께였고, 2023년에는 일본 <팀아이> 방문단과 함께였다. <팀아이>는 한국 <무용신>의 자매단체로 우리학교 후원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행사를 함께 해 온 동지 단체이다.

 

 

망월동에 혼자 갈 때는 유스퀘어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느라 고생했는데, 두 번째는 홍양현 선생의 운전으로 편하게 참배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방문은 <팀아이>와 동행했던 2023년 11월의 방문이었다.

 

<팀아이> 방문단은 통영에서 나주에 가는 길에 망월 묘지를 참배하기로 했는데, 통영에서 진주까지는 버스를 탔다. 정세화, 신도 도시유키 선생이 의논 끝에 진주터미날 앞에서 택시를 잡으셨다. 나는 택시비 걱정이 되었는데, 두 분은 기사 분과 10만원으로 쇼부(勝負, しょうぶ)를 치셨다.

 

따져보니 일행 5인의 버스비와 택시비는 그다지 차이나지 않았고, 광주 시내를 거치지 않고 망월묘역까지 바로 갈 수 있어서 시간도 절약되었다. 덕분에 그날 저녁 나주 식구들이 준비한 만찬에 늦지 않았다. (나중에 들으니 팁으로 2만원을 더 드렸다고 한다. 하긴 일본에서는 택시요금이 엄청 비싼데, 진주에서 광주까지 택시비가 1만엔에 불과하니 얼마나 고마우셨을까.)

 

 

이번 방문도 힘들지 않았다. 버스로 바로 망월동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참배한다면서 교통을 통제하는 바람에 신묘역은 건너뛰고 바로 구묘역으로 향했다. (우의장 때문에 우리의 참배가 불편해진 면도 있었지만, 그도 5.18 당일 참배객의 불편을 덜기 위해 이틀 앞서 망월동에 온 것이리라. 나름 일반 참배자들에 대한 배려였던 것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으므로 분위기는 자못 비장했다. 이곳에 묻히신 영령에 참배하면서 특히 해남 출신의 민족시인 김남주(金南柱, 1946-1994) 선생의 묘 앞에서는 이성호 선생의 추도사를 경청했고 묵념도 올렸다. 이성호 선생은 김준태(金準泰, 1948-) 시인의 이야기도 곁들여 주셨는데 두 시인이 모두 해남 출신인 것을 보면 그 고장이 문향인 모양이다.

 

 

나는 김준태 시인을 만난 적이 없지만 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덕분에 인생이 잠시 팍팍해졌던 경험이 있다. <메아리> 대표이던 19835, 이 시를 노래책 <메아리 6집 증보판(1983)>에 실었다가 친구 2명과 함께 수배를 당했고, 3개월 동안 (전문용어로) “도바리를 쳐야했다. 결국 세 명은 학교를 쉬었고, 나중에야 복학할 수 있었다.

 

전문 1186행의 이 장시는 198062일자 <전남매일신문>에 처음 실렸는데, 군부의 검열 때문에 제목을 <아아 광주여>로 줄여야했고, 김준태 시인은 학교에서 해직을 당했다. 당시 광주와 한국에서는 잘 몰랐겠지만, 이 시는 이미 국제적으로 유명해지고 있었다.

 

 

미국 하버드대 영문학과의 데이빗 맥캔(David R. McCann, 1944-) 교수는 이 시를 영역해서 영미권에 배포했고, 일본 월간잡지 <세카이(世界)>도 전문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타이완 타이뻬이 소재 국립정치대학의 주리시(朱立熙) 교수는 이 시를 중국어로 번역했는데, 이런 유명한 시를 2만권의 노래책에 전문을 실어 전국에 배포했던 사람으로서, 전두환 패거리에게 수배 받고 도망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이 좀 있었지만, 지금은 자랑스럽게 느끼고 있다.

 

 

묵념을 올리다가 조금 일찍 눈을 뜨고 사진을 찍었다. “함께 맞는 비라고 쓴 노란 우산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산자들이 죽은이들이 함께 비를 맞는 모습은 말로 하기 어려운 아련함과 뭉클함을 준다. 그럴 때는 잘 쓴 글보다 구도를 잘 잡은 사진 한 장이 정답일 수 있다. (jc, 2025/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