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은하수2025보성

[은하수2025보성] 4. 거북정의 역사

거북정은 은하수의 2025년 보성 소풍에서 미학적 감수성을 한껏 자극해 준 아름답고 유서가 깊은 건축물이다. 이름에 ()’자가 붙기는 했지만 경관 감상을 위한 정자는 아니고, 봉강 정해룡(丁海龍, 1913-1969) 선생이 태어나 거주했던 주택이다.

 

 

봉강 선생의 사적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이 집을 봉강 정해룡 생가라고 부르지만, 2005년 전라남도가 이 주택을 문화재자료 261호로 지정할 때의 공식 이름은 전남 보성 봉강리 정씨 고택이다.

 

주택 이름에 어째서 정자 정자를 붙였을까, 하는 것이 첫 의문이었다. 궁금하면 찾아보게 마련이다. 요즘은 누각(樓閣)이나 정자(亭子)가 벽이 없이 사면이 트여서 주변 경관을 감상하는 건축물을 가리키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중국 후한시대의 허신(許愼, 58-148, 혹은 30-124)이 저술한 한자 사전 <설문해자(說文解字)>정자 정()’자를 사람이 편안하게 머무르는 곳이다(民所安定也)”라고 풀이했다.

 

 

, 거북정은 영광 정씨가 4백 년 동안 편안하게 거주해 온 종택(宗宅)이 되었다. 정해룡 선생은 영광 정씨 사평공파의 13대손으로 알려져 있는데, 적어도 정해룡 선생 이전까지의 약 4백년은 거북정이 영광 정씨가 편안하게 머무르는 곳이었음에 틀림없다.

 

영광 정씨 사평공파의 중시조는 반곡 정경달(丁景達, 1542-1602) 선생이다. 전남 장흥 출생의 정경달 선생은 1570(선조3)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92년 선산 군수 재임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산 전투에서 패했지만, 이후 유격전으로 왜군 415명을 참수했던 금오산대첩의 주인공이다. 1594년에는 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의 요청으로 그의 종사관으로 발탁됐고, 이순신 장군이 원균의 모함으로 투옥되자 정경달 선생은 선조에게 직소하여 석방을 탄원했다.

 

 

정경달 선생의 둘째 동생 정경영(丁景英, 1547-1616)은 아들 정창열(1579-1619)과 함께 정경달 선생의 선산전투와 금오산전투에 참여했고, 정경달 선생이 관직을 마치고 전남 장흥으로 낙향했을 때도 동행했다.

 

이후 정창열의 둘째 아들 정손일(丁巽一, 1609-?)은 보성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회천면 봉강리 677번지에 터를 잡았고, 이후 약 350년 동안 영광 정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즉 지금의 정씨 고택을 처음 지은 사람은 정손일 선생이었던 것이다.

 

 

정손일 선생이 이곳에 새로운 집안의 터를 잡을 때, 풍수설의 대가로 알려진 도선국사(道詵, 827-898)의 저술 <비결(秘訣)>을 참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는 장흥읍에서 동쪽 약 40리 지점은 신령한 거북이 바다로 내려가는(靈龜下海) 형세라면서 이 지점이 거북의 머리에 해당하는 길지(吉地)”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결>이 거북정의 터를 서술하면서 장흥읍으로부터의 거리를 제시한 것은, 당시에는 회천면이 보성군이 아니라 장흥군에 속했기 때문이다. 카카오맵으로 장흥읍에서 거북정까지의 도보길 거리를 측정하니 16.7킬로미터, 41.8리였다. 천 년 전에 저술된 <비결>의 거리 계산이 이토록 정확했다는 점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편 구글맵으로 장흥읍-거북정의 직선거리를 측정해 보니 13.1킬로미터, 32.8리였다. 따라서 도선국사가 <비결>을 저술할 때 사용한 거리 측정의 기준은 직선거리가 아니라 도보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비결>은 일일이 걸어다니면서 쓴 책이라는 말이다.

 

 

거북정에는 사랑채가 두 개다. 대문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바깥사랑채가 있고 중삼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에 난 쪽문으로 들어가면 안사랑채가 있다. 안사랑채를 건축한 것은 정손일 선생의 현손(=손자의 손자, 4대손) 정도삼(丁道三) 선생인데, 이때부터 영광 정씨 종택이 <거북정>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정도삼 선생의 호가 구정(龜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택이 이미 거북정으로 불리고 있었고, 정도삼 선생이 가택의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정도삼 선생은 자손이 없어 혈통을 잇지 못하게 되자 정경달 선생의 후손인 정도인(丁道仁)의 셋째 아들 정윤필(丁允弼)을 양자로 들여 혈통을 이었다.

 

 

정해룡 선생의 조부 정각수(丁角壽) 선생은 초가로 지어진 거북정의 안채를 기와집으로 중수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안사랑채도 이때 기와집으로 개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해룡 선생은 안사랑채 앞에 정원을 조성하면서 일림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흘러지나가는 한반도 모양의 연못을 만들고, 그 주변에 사군자를 심었다.

 

거북정의 정원은 나지막한 돌담으로 둘러 싸여서 뜻과 아름다움이 충만하게 겸비된 하나의 작은 세계를 이루고 있다. (jc, 2025/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