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은하수 정기 소풍이 정해진 것은 두 달쯤 전이었다. 지도부가 아미원에서 준비회의를 열었는데, 나는 테이블 위에 널린 그릇을 치우러 아미원에 갔다가 엿듣게 되었다.
정해열 선생의 제안으로 목적지는 전남 보성으로 정해졌는데, 행주질을 하던 나는, ‘보성군이면 벌교도 가면 좋겠네’ 하는 소망을 품었다. 그 소망을 입 밖에 내지 못했지만, 방문지에 태백산맥문학관도 포함되는 바람에 결국 벌교도 가게 됐다. 나는 바로 소풍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차편과 식사, 답사와 강연 등의 일정도 의논되었겠는데, 세부사항은 지도부가 잘 알아서 결정하실 것이니 내가 이렇쿵저렇쿵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중에 결정된 것을 보니까 광주 망월의 국립묘역 참배도 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과연 은하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망월 묘역 참배가 네 번째다. 2018년에 처음 갔던 이래, 2022년에는 나주의 홍양현 선생과 함께였고, 2023년에는 일본 <팀아이> 방문단과 함께였다. <팀아이>는 한국 <무용신>의 자매단체로 우리학교 후원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행사를 함께 해 온 동지 단체이다.
망월동에 혼자 갈 때는 유스퀘어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느라 고생했는데, 두 번째는 홍양현 선생의 운전으로 편하게 참배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방문은 <팀아이>와 동행했던 2023년 11월의 방문이었다.
<팀아이> 방문단은 통영에서 나주에 가는 길에 망월 묘지를 참배하기로 했는데, 통영에서 진주까지는 버스를 탔다. 정세화, 신도 도시유키 선생이 의논 끝에 진주터미날 앞에서 택시를 잡으셨다. 나는 택시비 걱정이 되었는데, 두 분은 기사 분과 10만원으로 쇼부(勝負, しょうぶ)를 치셨다.
따져보니 일행 5인의 버스비와 택시비는 그다지 차이나지 않았고, 광주 시내를 거치지 않고 망월묘역까지 바로 갈 수 있어서 시간도 절약되었다. 덕분에 그날 저녁 나주 식구들이 준비한 만찬에 늦지 않았다. (나중에 들으니 팁으로 2만원을 더 드렸다고 한다. 하긴 일본에서는 택시요금이 엄청 비싼데, 진주에서 광주까지 택시비가 1만엔에 불과하니 얼마나 고마우셨을까.)
이번 방문도 힘들지 않았다. 버스로 바로 망월동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참배한다면서 교통을 통제하는 바람에 신묘역은 건너뛰고 바로 구묘역으로 향했다. (우의장 때문에 우리의 참배가 불편해진 면도 있었지만, 그도 5.18 당일 참배객의 불편을 덜기 위해 이틀 앞서 망월동에 온 것이리라. 나름 일반 참배자들에 대한 배려였던 것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으므로 분위기는 자못 비장했다. 이곳에 묻히신 영령에 참배하면서 특히 해남 출신의 민족시인 김남주(金南柱, 1946-1994) 선생의 묘 앞에서는 이성호 선생의 추도사를 경청했고 묵념도 올렸다. 이성호 선생은 김준태(金準泰, 1948-) 시인의 이야기도 곁들여 주셨는데 두 시인이 모두 해남 출신인 것을 보면 그 고장이 문향인 모양이다.
나는 김준태 시인을 만난 적이 없지만 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덕분에 인생이 잠시 팍팍해졌던 경험이 있다. <메아리> 대표이던 1983년 5월, 이 시를 노래책 <메아리 6집 증보판(1983)>에 실었다가 친구 2명과 함께 수배를 당했고, 약 3개월 동안 (전문용어로) “도바리”를 쳐야했다. 결국 세 명은 학교를 쉬었고, 나중에야 복학할 수 있었다.
전문 11연 86행의 이 장시는 1980년 6월2일자 <전남매일신문>에 처음 실렸는데, 군부의 검열 때문에 제목을 <아아 광주여>로 줄여야했고, 김준태 시인은 학교에서 해직을 당했다. 당시 광주와 한국에서는 잘 몰랐겠지만, 이 시는 이미 국제적으로 유명해지고 있었다.
미국 하버드대 영문학과의 데이빗 맥캔(David R. McCann, 1944-) 교수는 이 시를 영역해서 영미권에 배포했고, 일본 월간잡지 <세카이(世界)>도 전문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타이완 타이뻬이 소재 국립정치대학의 주리시(朱立熙) 교수는 이 시를 중국어로 번역했는데, 이런 유명한 시를 2만권의 노래책에 전문을 실어 전국에 배포했던 사람으로서, 전두환 패거리에게 수배 받고 도망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이 좀 있었지만, 지금은 자랑스럽게 느끼고 있다.
묵념을 올리다가 조금 일찍 눈을 뜨고 사진을 찍었다. “함께 맞는 비”라고 쓴 노란 우산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산자들이 죽은이들이 함께 비를 맞는 모습은 말로 하기 어려운 아련함과 뭉클함을 준다. 그럴 때는 잘 쓴 글보다 구도를 잘 잡은 사진 한 장이 정답일 수 있다. (jc, 2025/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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