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1) 한학자였던 최준현이 4자녀에게 신학문을 공부시킨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질문 2) 그가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이주한 것은 자녀들에게 신학문을 배우게 하려는 의도였을까? (질문 3) 최준현이 초기에는 자녀들을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 보냈으나 나중에는 대한제국 황실이 세운 학교에 보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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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부친 최준현은 한학자였다. 과거 시험(소과)에 합격한 진사였고, 관직으로는 능참봉을 역임했다. 정병호는 <춤추는 최승희(1995:17,407쪽)>에서 최준현이 서당 훈장으로 일한 적이 있다고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4명의 자녀에게 신학문을 공부하게 했다.

당시 조선에는 전통적인 초등학교로 서당이 있었다. 1920년대 조선 전역에는 2만 3천4백여 개의 서당이 있었고, 약 26만 명의 아동들이 서당에서 글을 배우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신교육의 보통학교가 전국에 약 500개였고 약 8만 명이 학생이 재학했다. 전통적인 서당의 학생 수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생 수보다 3배 이상 많았다. 한학자였던 최준현이 자식들에게 신학문을 배우도록 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최준현은 을사늑약(1905)과 군대해산(1907)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라가 망해가고 있던 시기에 최준현 일가는 홍천을 떠나, 보광리를 거쳐, 한성으로 이주했다. 장남 최승일이 출생한 1902년과 최준현이 희릉 참봉 제수받았던 1905년 사이였을 것이다.
그의 서울 이주가 관직 때문이었을 리는 없었다. 관직에 뜻을 두었다면 진사시에 합격하자마자 대과(문과) 준비를 했을 것이다. 게다가 최준현은 능참봉 제수 하루 만에 사직했다.
갑오 농민 혁명이 실패하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선비들은 조선의 국운이 기울었음을 알았다. 의병 운동이 왕성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암울한 상황에서 최준현이 한성 이주를 감행한 이유는 명백했다. 나라가 망하고 있었으므로 자식들에게는 신교육을 시키고 싶었다.

종주국이었던 중국이 무너지자, 궁중의 왕으로부터 초야의 서생에 이르기까지 믿을 것은 미국과 러시아 등 외세밖에 없음을 느꼈다. 일본의 야욕은 뚜렷했고, 자력으로는 이를 물리칠 수 없다는 것도 명백했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에서 손을 뗐고, 1902년 러시아마저 일본에 패배하자 희망이 사라졌다. 1905년 조선은 일제에 외교권을 잃으면서 실제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지식계급은 자신들이 불철주야 연마한 성리학이 총과 대포, 기차와 이양선 앞에 무용지물임을 알았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서당에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을 가르치고, 성균관에서 사서와 오경을 달달 외워서 일본의 침략을 막을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최준현이 그랬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사서오경에 능숙하고 시부를 짓고 읊을 줄 알았지만, 앞으로 전개될 세상에서는 그런 지식이나 능력이 소용없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는 신학문을 가르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홍천에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가 없었다. 홍천군에 신식 공립 보통학교가 세워진 것이 1920년이었다. 따라서 신학문을 배우려면 대처로 나가야 했다. 홍천에서 가까운 대도시는 춘천이었고 춘천 공립 보통학교(1906)가 설립되어 있었지만, 최준현은 바로 한성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이주한 한성의 인달방, 즉, 수창동에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들이 많았다.
수창동 북쪽에는 통의동의 매도 보통학교와 필운동의 배화여학교, 누하동의 매화 여학교와 창성동의 진명여학교가 있었다. 남쪽에는 정동에 경성 여자보통학교와 이화학당, 배재학당이 있었고, 수창동의 바로 동쪽,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뒤쪽 도렴동에는 양정의숙이 있었다. 광화문 앞 세종로 건너에도 수송동의 숙명 여학교와 수송보통학교, 견지동의 동독 여학교가 있었다.
따라서 수창동은 성벽으로 가로막힌 서쪽만 제외하고 삼면이 학교들로 에워싸인 지역이다. 경성중학교(=서울고등학교 전신)와 경성 제일 공립고등 여학교, 서대문소학교와 종로소학교 등의 일본인 학교들도 포진해 있어서 경성의 교육 중심지 중에서도 한복판이었다. 최준현이 경성의 다른 곳을 제치고 수창동을 택한 것은 바로 이 학교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1910년에 장남 최승일이 학령에 도달하자, 최준현은 최승일을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협성 보통학교에 입학시켰고, 협성보교를 졸업한 후에는 배재학당에 입학시켰다. 신교육 중에서도 일본식이 아니라 서양식을 선호했다는 뜻이다.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1885년 개교)은 사립학교였으므로 제1차 조선교육령을 따르지 않아도 되었고, 독자적인 학과와 교육 방침을 유지했다. 대한제국 시절인 1909년 사립학교령에 따라 ‘배재고등학당’으로 격상된 학교 이름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일제는 선교사들이 세운 사립학교도 그냥 두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사립학교 규칙을 개정해 사립학교도 조선교육령을 따르도록 강요했다. 배재학당은 1916년에 배재고등보통학교로 개칭됐고, 2학년이던 최승일은 3학년부터 고등보통학교의 과정을 이수해야 했다.

최준현은 배재학당의 교육에 실망했던 것 같다.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들도 일제에 굴복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복에서 규율까지 완전히 일본식인 공립학교에 자녀들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최준현은 그 대안으로 둘째인 최영희를 선교사 학교인 이화학당이 아니라 조선 황실이 세운 진명여학교에 입학시켰다.
진명은 숙명, 양정과 함께 조선의 황실이 세운 학교였다. 고종의 황비인 순헌황귀비 엄씨는 황실 재원으로 세 개의 학교를 세웠다. 양정의숙(1905년)과 진명여학교(1906년), 그리고 명신여학교(1906년)였다. 명신여학교는 1911년 숙명 여학교로 개칭됐다. 양정의숙은 법학과 경제학을 교육하면서 국가를 경영할 인재를 양성하려던 남학교였다. 진명과 명신은 대한제국 황실이 세운 최초의 여학교였다.
두 여학교 중에서도 진명은 서양식 일반교육을 목표로 했고, 명신은 일본의 학습원을 모델로 한 귀족 교육을 목표로 삼았다. 실제로 이 두 학교는 개교 초기에 큰 차이를 보였다. 진명은 처음부터 학생들이 많이 몰려서 보통과와 고등과, 유치과와 예비과가 모두 성황을 이루었지만, 입학 자격을 양반과 귀족으로 제한한 명신 학교는 학생 수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20세기가 되기 전에도 조선에는 신식 여학교가 여럿 있었다. 한양에 이화학당(1886)과 정신 여학교(1895)와 배화여학교(1898)가 있었고 평양에는 정의 여학교(1894)와 숭현 여학교(1896)가 있었다. 동래의 일신여학교(1895)와 인천의 영화 여학교(1897), 개성의 호수돈여학교(1899) 등도 잇달아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여학교들은 모두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것으로 여성 교육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선교사업을 위한 보조수단이었다.
한편, 한양 북촌에 사는 양반 부인 4백여 명이 ‘찬양회(讚揚會)’라는 부인 단체를 결성하고 순성 여학교(1898)를 설립했는데 이것이 조선 민간인이 설립한 최초의 여학교였다. 그러나 이 학교는 1905년 국권이 침탈되면서 해체되었다.

황실과는 별도로 대한제국 정부도 한성 고등여학교(1908)를 설립해 여성 교육을 통해 국권을 지키고 국난을 극복하려고 했으나 때가 늦었다. 대한제국은 이미 외교권과 행정권의 절반을 잃었고 머지않아 국권 전체가 일제의 손에 넘어가게 될 운명이었다. 한성고등여학교는 1911년 일제 강점 아래서 관립 경성 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칭되어 일제의 교육체계 안에 편입되었다.
일제가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자 1912년부터는 진명과 숙명 여학교도 여타의 공립 여학교나 다른 사립학교들과 마찬가지로 일제가 명령한 일률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해야 했다. 양정의숙도 법학과 경제학의 특장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고등보통학교로 변모해 버렸다.

최승희의 언니 최영희가 진명에 입학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1912년의 진명은 ‘황실 엄 귀비가 설립하신 학교’라는 자부심을 제외하고는 다른 학교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이것은 이화나 배화 등의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여타 사립학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일제는 조선인의 교육제도를 일률적으로 엄격하게 통제하기 시작했다.
최준현은 장남이 수학했던 서양식 배재학당보다 최영희를 입학시켰던 대한제국 황실이 설립한 진명여학교에 만족했던 것 같다. 그래서 막내딸 최승희도 숙명 여학교에 입학시켰다.

양정과 진명과 숙명은 황실 학교라는 자부심에 바탕을 둔 연대적 자부심도 대단했다. 이 세 학교의 졸업생들이 양명회라는 연합 동창회를 결성해 활발하게 활동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jc, 202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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