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1) 최승희의 부친 최준현은 왜 강원도 홍천에서 한성으로 이주했을까? (질문 2) 한성에서도 북문동(=일제 강점 후의 수창동, 오늘날의 내수동)에 주택을 사들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질문 3) 수창동의 사립 협성보통학교는 어떤 학교였을까?
최준현이 경성 이주를 결정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꼽았던 조건은 학교였음이 틀림없다. 경성 이주의 근본 동기가 자녀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맹모삼천지교라는 고사를 실천한 것이다.
최준현은 네 자녀, 특히 맏아들인 최승일을 경성의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준현이 이주할 지역을 결정할 때 좋은 학교 소재지를 찾았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성의 북문동, 즉 일제 강점 후에는 경성의 수창동이 된 곳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수창동 북쪽에는 신교육을 제공하는 초등학교가 네 개나 있었다. 통의동의 매동보통학교와 필운동의 배화여학교, 누하동의 매화여학교와 창성동의 진명여학교이다. 수창동 198번지의 최준현 자택에서 모두 걸어서 10분 이내의 거리에 있었다.
수창동의 남쪽으로는 정동에 경성여자보통학교와 이화학당, 배재학당이 있었고, 동쪽에는 수송동의 숙명여학교와 수송보통학교, 견지동의 동덕여학교가 있었다. 역시 걸어서 10분 이내의 거리에 있었다. 거기서 북동쪽으로 더 올라가면 학생들의 선망이던 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가 있었고 1908년에 막 개교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도 있었다. 두 학교는 도보로 15분 거리다.
따라서 수창동은 성벽으로 가로막힌 서쪽만 빼고 삼면이 좋은 학교로 에워싸인 지역이다. 경성중학교(=서울고등학교 전신)와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 서대문소학교와 종로소학교 등의 일본인 학교들도 포진해 있어서 경성 교육 중심지 중에서도 한복판이었다.

그래도 왜 하필 수창동이었을까? 그에게는 장남 최승일의 보통학교 진학이 최우선의 관심사였을 것이다. 아들을 입학시킬 수 없는 일본인 학교와는 가깝지 않아도 좋고, 조선인을 위한 고등보통학교(=중학교)도 급한 것은 아니다. 그가 먼저 찾아 나선 것은 조선인을 위한 우수한 ‘보통학교,’ 즉, 초등학교였음이 틀림없다.
1925년에 발행된 지도인 <경성시가도>를 보면 수창동 한복판에 ‘협성(協盛)보통학교’가 있다. 기독교의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으로 설립한 초등학교다. 남녀 공학으로 서양식 학제와 교과목으로 운영되던 근대식 초등교육기관이었다. 설립자이자 교장은 감리교 선교사 아더 베커(Arthur L. Becker, 1879-1978)였다.
베커 선교사는 1897년 평양에서 장로교의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1862-1931) 선교사와 함께 숭실학당을 설립했다. 숭실학당은 1905년 대한제국의 인가를 받은 조선 최초의 근대식 대학교였다. 그는 1915년에도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 선교사와 함께 조선 기독교 대학(Chosun Christian College)을 설립했다. 이는 1917년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오늘날의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좋은 학교 설립의 달인이었던 베커 선교사가 협성보통학교의 교장직을 맡고 있었다. 요즘 협성보통학교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는 학교였다.

수창동 229번지에 자리잡았던 협성보통학교는 1919년 천도교계 인사들이 삼일운동이 준비되었던 발상지 중의 한 곳으로 꼽히기도 한다. 1959년 2월 27일자 <조선일보>(3면)에 게재된 "삼일운동 발상지의 금석"이라는 연재기사 제4번째 기사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이 ... 2월17일밤 협성보통학교 내의 박희도 댁에서 기독교계 인사들과 회합을 가졌다. 이때 협성보통학교는 언더우드를 교장으로 하고 박희도는 그 교원으로 있는 한편, 중앙청년회 간사의 일을 보고 있었다. 이날 회합에서 기독교는 서울 및 서북 방면만이 아니라 원산 방면에도 동지를 구하기로 하고, 이날 회의에 참석하였던 원산의 정춘수가 이를 담당하기로 되었던 것이다."
1920년 11월 22일의 <매일신보>(3면)에는 ‘수창동의 사립협성보통학교가 자선시장’, 즉 바자회를 열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1921년 6월 22일의 <매일신보>(3면)도 협성보통학교가 ‘소년 야구대회’에 참가해 보통학교부 우승을 차지한 사실을 보도했다. 1927년 7월 16일의 <중외일보>(2면)에도 협성보통학교의 지역 봉사 행사가 보도되었다. 여름방학 동안 빈 교사를 이용해 여성들을 위한 영어와 수학 강습을 시행한다는 기사였다.

“시내 수창동 협성보통학교에서는 오는 이십오일부터 팔월 이십일일까지 매일 오후 다섯 시부터 일곱 시까지 중등 정도의 일반 신여성들을 위하여 수학과 영어의 하기 강습을 개최하리라는데 회비는 이원이며 강사로는 다년간 교수의 경험이 있는 선생을 초빙하리라더라.”
한 달간 매일 2시간씩 진행되는 강습비가 2원이었다. 당시 커피값이 10전이었으므로 커피 20잔 값이다. 하루 커피 한잔을 절약하면 참가할 수 있었다. 더욱 눈길을 끈 것은 이 특별 강습회가 여성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여성 권익 개념이 없던 시기에 보기 드문 행사였다.
1925년 10월 12일의 <매일신보>(2면)에도 협성보통학교의 가을 운동회 소식이 보도되었는데, 놀라운 것은 참가 인원이다. 기사는 “시내 수창동에 있는 사립 협성보통학교 생도 칠백 남녀 아동은 그 학교 안에서 추계 운동회를 개최한다더라”라고 보도했다. 생도 수가 7백 명이었다. 아마도 경성부 내 최고 기록이었을 것이다. 한 학년 생도가 2백 명에 가깝기 때문이다.

1910년의 협성보통학교 학생 수를 보여주는 사진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유물 자료로 보관된 협성보통학교 조회 장면을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에서는 협성보통학교의 학생 수가 눈대중만으로도 4백 명에 가깝다. 그중 3분의 1 이상이 여학생이었다. 서울역사박물관에는 여학생 졸업자 단체 사진도 있는데 1910년 여학생 졸업자 수가 56명이었다.
<매일신보>의 보도대로라면 15년이 지난 1925년에는 학생 수가 다시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협성보통학교의 사립이면서도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인근의 매동 보통학교의 1910년 전교생 수는 197명이었다. 인근의 다른 보통학교들에 비해 학생 수가 2-3배 이상 많았다는 것은 협성보통학교의 교육의 질이 좋았고 그 때문에 유명했다는 뜻이겠다. 자녀를 이 학교에 보내려는 학부모들이 많았을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그랬다. 1936년 4월 23일 <조선중앙일보>(2면)에는 경성 보통학교로 전학시키려는 학부모들 때문에 북새통을 이룬 사실을 보도했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보자.
“이번 전학에 8백여 명 전학 지원자가 있었던 중 그중 5, 6학년 지원자만 3백 명에 달하였으나 입학 후보로 결정된 것은 겨우 12명에 불과하여 나머지 2백88명은 결국 불허가가 되고 말았다. ... (경성)부 학무과에서는 5, 6학년을 겸하여 60명만을 수용할 만한 학급이 있는 학교를 물색하던 중 부내 당주정 협성보통학교로 이것을 정하게 되었다 한다.
"동교는 규모와 관리에 있어 상당히 평판이 좋으므로 이 학교에다 한 학급을 두기로 된 것이며 60명에 대하여 역시 매인에게 50원 평균의 경영비를 부담시켜 전부 3천 원으로 이것을 경영하기로 되었다 한다.”
협성보통학교는 ‘규모’도 있고 ‘관리’도 잘해서 ‘상당히 평판이 좋은 학교’였다고 한다. 1933년 12월 3일 <매일신보>(2면)에는 경성 교육위원회가 협성보통학교 교사를 ‘교육효적자’로 표창한 사실도 보도했다. 따라서 자녀를 이 학교에 입학 또는 전학시키려는 학부모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최준현도 그런 학부모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아들 최승일을 협성보통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수창동으로 이사한 학부모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수창동 198번지의 집은 협성보통학교에서 걸어서 2-3분 떨어진 거리였다. 최승일뿐 아니라 그 동생 최승오와 최영희까지도 이 학교에 보낼 계획으로 시기를 맞추어 이주를 감행했을 것이다.
최준현은 자녀들에게 최상의 교육을 받게 하려는 열성과 함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재력도 있었다. 보광리 시골집을 판 돈으로 경성에 51평 기와집을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에게는 이미 충분한 돈이 있었다는 뜻이다. 최준현이 수창동에 정착할 때 그는 부유한 지주였다. 수창동 198번지로 이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수창동 134번지로 이사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1911년 말 최준현 가족은 새로 태어난 최승희를 포함해 모두 7명이었다. 아버지 최준현과 어머니 박용경, 서모 이재원과 최승희 형제 4명이다. 최승일이 결혼해서 아내와 함께 살았더라도 8명이었을 것이다. 198번지 주택도 8명이 살기에 그리 좁은 집이 아니었을 것이다. 새로 이사한 134번지는 그보다 두 배 이상 넓은 114평이었다. 아마도 최승희 출생 이후 식구가 늘었다는 이유로 더 큰 집을 마련한 것이리라.
지적원도에 나타난 114평은 건평이다. 집 건물의 규모가 얼마나 되었고, 방 칸수는 몇 개였는지 알아낼 방법은 지금 없다. 하지만 넓은 마당과 넉넉한 화단, 널찍한 장독대를 포함해서 8명이 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던 집이었음이 틀림없다. (jc, 2019/1/29; 2026/1/17)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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